[스크랩] 위선과 교양 그리고 거짓말
| |
|
위선과 교양 그리고 거짓말 |
![]() |
amharez |
|
위선과 교양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내 눈에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쉽게 보인다. 공통점은 바로 ‘거짓’이다. 위선이야 말 그대로 선을 가장하는 것이니 거짓임이 분명하지만, 교양도 거짓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교양은 본능에 가까운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다. 나는 교양의 극치를 언젠가 아주 야한 패션쇼에 참석한 안성기와 도올 김용옥의 사진을 보면서 발견한 일이 있다.
안성기의 저 무덤덤한 표정은 교양의 극치인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의 본성을 억눌러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의 극치로 평가된다. 오히려 두 눈을 치켜 뜬 도올 김용옥의 표정은 교양머리는 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속마음 그대로의 천진난만함(?)을 찾을 수 있다. 도올의 눈빛은 링크해 놓았으니 확인해 보시길. http://blog.naver.com/lsmin97/140026556044
위선과 교양은 사실 한 끝 차이다. 어떤 사람은 위선은 자기를 위한 속임이고 교양은 남을 위한 속임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위선이나 교양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다. 교양 있게 행동해야 자신의 사회적 평판이 좋아지기 때문에 체신머리를 지키는 것이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는 보장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교양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질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교양 머리 없는 대통령을 뽑으라면 노무현 대통령이 수위에 꼽힐 것이다. 내가 노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이긴 해도, 사회의 일반적 시각 즉 평균인의 시각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교양 머리가 없는 대통령으로 꼽힐 것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요즘 논란이 되는 행정수도 공약과 관련한 말이었다. 기자들 앞에서 행정수도 공약으로 ‘재미 좀 봤다’라는 표현을 써서 지지자들에게는 난감함을, 반대자들에게는 행정수도 공약이 정략적 차원에서 나왔다는 증좌로 단골손님처럼 쓰였다.
‘재미 좀 봤다’라는 표현을 교양 있게 번역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행정수도 공약으로 지지율 상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행정수도 공약의 충정을 국민들이 받아들인 결과이며 나는 오직 국가 백년지대계를 위한 충정에서 이 공약을 마련했을 뿐이다.]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이것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자들 앞에서 ‘재미 좀 봤다’는 표현은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이 국가 백년지대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대통령 당선에만 눈이 멀어 단기간에 급조해낸 공약이라는 것을 자인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수많은 조중동의 신문기자와 수많은 우파 칼럼니스트들이 그렇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의도적 왜곡일 뿐이다. 저 말은 농담이다. 교양 머리 없는 농담이라는 비판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저 말이 대통령 스스로 행정수도 공약이 오직 표만 좇아 만든 공약임을 자인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 공세로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실증적 사회과학 분석으로는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행정수도의 찬성 여부, 혹은 대통령의 말하는 자세에 대한 가치관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도, 저 말이 자신의 정략을 인정한 말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객관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이 가지고 있는 속성의 한 측면을 솔직히 인정하였고, 이것이 정치적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이다. 사실 모든 정치인의 공약은 포퓰리즘적 속성과 공익적 속성을 모두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절대로 자신의 공약이 가지고 있는 포퓰리즘적 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가끔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솔직 화법으로 드러내 화를 자초하는 일이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또 정파적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으니 이번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례를 들어보자.
2007년 대선 때의 일이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이명박 후보가 본인이 BBK를 만들어 경영하고 있다는 발언을 한 동영상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동영상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명박 지지자는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반대자들은 드디어 이명박을 잡을 결정적 물증을 잡았다고 환호했다.
사실 내 주위에서 나랑 친한 사람치고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기에 모두들 흥분에 찬 목소리로 이명박 저 거짓말쟁이라고 성토를 하였지만, 나의 반응은 주위 사람을 당황스럽게 할 정도로 차분하였다. 나는 싸하게 말했다.
“저 동영상으로 이명박이 BBK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강의 도중에 스스로 BBK라는 회사를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도 왜 증거가 될 수 없냐고 애꿎은 나에게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화를 내는 사람 앞에서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참 난감했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강의 도중에는 원래 자뻑에 취해서 과장을 많이 하는 법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설득이 되지는 않는 눈치였다.
사실 그렇기는 하다. 본인이 본인 입으로 BBK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증거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때도 지금도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거짓말 하면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직업이 남을 가르치는 직업이다. 성서에 보면 선생 되기를 두려워하라는 구절이 있다. 선생이 될수록 틀린 말을 할 확률도 많아진다는 요지인 것으로 기억이 된다.
선생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많다. 학생의 논리가 맞아도 온갖 궤변과 강압을 동원해 학생들의 동요를 막아야만 훌륭한 교사가 된다. 만약 학생의 논리가 일부분 맞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에 교실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타고난 카리스마로 논리적 반발을 원천 봉쇄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궤변을 자신 있게 떠벌일 배짱이 있어야 한다. 보통 나는 학생들에게 솔직히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하는 편이긴 하지만, 모든 일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만 보면 궤변을 궤변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선생님들이 계신다. 주로 관리자에게 칭찬을 많이 받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님들이신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궤변을 당당하게 펼치지 못한다. 그것은 스스로 궤변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진실이라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고3 담임이 되고 3월 시작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까? 이것은 아직도 나에게 풀리지 않는 고민 중에 하나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작년 성적 데이터를 분석하면 90% 이상의 적중률로 갈 수 있는 대학의 박스권을 그려낼 수 있다.
사실 고3 올라오면 입시가 1년 정도 남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것저것 제하고 나서 엄밀히 계산하면 공부할 수 있는 기간은 채 반년 정도이다. 이 기간에 괄목할만한 성적 향상을 기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학원은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쉽게 해댄다. 믿고 맡겨주시면 최대한 성적을 끌어 올린다는 부도 수표를 남발한다. 이런 부도 수표가 어떻게 매년 성공할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치료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난치병을 완치했다고 광고를 많이 하는 한의원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야자를 빼먹고 그런 학원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보통 담임 선생님들은 말린다. 그런 학원 다 거짓말이고 학교에서 야자를 열심히 하는 것이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학원에서 학원 강사가 성적을 올려주겠다는 말이나, 학교에서 야자를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학교 담임 선생님의 말이나 실증적으로 ‘사실성’에 있어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거짓말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는 내가 남을 속이려는 나쁜 의도에서 나오는 거짓말로, 말하는 당사자가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촛불집회가 한참일 때 주위 선생님들과 이명박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들 이명박의 정략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명박의 충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대운하가 정말로 어떤 합리성이 있지 않나 찾아보고 싶다는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대운하가 전혀 말도 안 되는 공약일 수는 있어도, 이명박 대통령이 나라 망하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 대운하를 추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나쁜 대통령도 나라를 그렇게 다스리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도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했던 이명박의 진정성만큼은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참여정부 당시 한미FTA 반대 운동을 앞장서서 하던 사람과 대화할 일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많은 좌파들이 물었다. 도대체 나라를 망하게 할 한미FTA를 노무현 대통령이 무슨 생각으로 추진하냐는 것이었다. 모두들 노무현 대통령의 머릿속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청와대 비서관 출신이었던 그에게 물었던 것이다. 그의 대답은 ‘모른다’였다.
당시 질문과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이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한미FTA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대운하도 마찬가지지만 추진하는 사람의 속내를 최대한 끄집어내어 그 속에 내재한 합리적 논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어떠한 일이건 그것의 실체를 아는 것은 아니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한미FTA를 찬성했던 상당수의 우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고, 그들 중에 좌파가 흔히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자 아닌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참여정부 당시 한미FTA는 찬성하였지만, 대부분 친한나라당 성향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궁금한 사항을 유수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였던 그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좌파인 노무현이 한미FTA를 추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느냐? 그 중 한 사람의 대답은 진실로 실망스러웠다. 어쩔 수 없어서 추진하는 것이라고... ... 자세히 물어보았지만 깊이 있는 고민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냥 좌파인 노무현이 한미FTA를 추진하니 신기할 따름이고 평소의 소신과 맞아떨어져 지지할 따름일 뿐, 그것을 왜 추진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사실 계량경제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마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한미FTA추진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이 궁금했던 것인데, 경제학자가 그것을 대답하기에는 전혀 전공분야가 달랐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경제학은 사회과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물리학에 가까운 학문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회적 주장이나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진하는 사람의 선의를 전제하는 분석도 유용하다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지론 중에 하나이다. 물론 나의 지론이라고 해봐야 나도 모르게 선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생각이겠지만, 원전을 들이밀 학식이 없으니 일단 나의 지론이라고 해둬야겠다.
사회과학이 제대로 태동하기 전에는 인간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힘으로 다스리는 것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속임수를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을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들의 위선과 교양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속임수를 정치에 이용해야 한다는 천기를 누설한다.
기존의 사회 관계가 선이라는 공식을 무너뜨리고 중세적 세계관의 속임수를 폭로하는 것은 계몽주의적 사고가 가져온 일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질서나 도덕이 가지고 있는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기득권을 해체하는 작업은 모든 전복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헬베티우스와 홀바하의 사제기만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너무나 단순하여 오늘날은 일반 사람들도 스스로의 이야기로 전개할 수 있는 논지를 가지고 있다. 종교지도자가 권력자와 결탁하여 대리충족의 비실제적 세계를 창조하여 지배집단과 화해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 복종을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성직자는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존 권력 관계의 유지와 강화를 위하여 민중을 끊임없이 속인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이 이론의 가장 큰 맹점은 지배자 자신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본 데 있다. 사제 자신은 계몽되어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 거짓말로 모든 사회현상의 이면을 분석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는 유효하지만, 진정으로 모든 현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에는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한 이명박이나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한 노무현의 의도적 거짓말로 그 공약들을 살펴봐선 안 될 것이라고 본다.
사실 나의 선의는 다른 사람에게 악의가 될 수 있고 나의 진심이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나 실상은 이러한 기초적 역지사지를 하는 것은 그닥 쉽지는 않은 법이다.
사회화라는 말을 처음 배울 때 나는 이것을 ‘교육’의 효과와 비슷한 의미로 오인하였다. 이것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들어와 내면화 되어 원래부터 내 안에 있던 것처럼 생각되게 만드는 사회화의 기제를 깨달은 것은 사회학이란 학문을 접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사회화를 통해 어떤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체화하게 되면 우리는 ‘사실’을 분석할 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에드가 모랭의 ‘20세기를 벗어나기 위하여’라는 책을 보면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다 알다시피 이것은 날조된 이야기다. 다수의 목격자와 피해자의 진술, 청렴한 외국학자들이 연구소로 초대되어 현미경 속에 우글거리는 병균들을 눈으로 확인하였고 이는 책으로 나와 세균전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는 다시 대한민국에 수입되어 수많은 주사파들에게 전파되었다. 주사파들은 진실로 이 이야기를 사실로 믿었고 그리고 사실로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가짜 김일성론은 조작된 사실로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라 되풀이하기도 식상하다. 만주 벌판에서 비정규군의 수장으로 이순신장군과 같은 50대 노장이 존재할 수 없는 현실과 다른 공산국가의 혁명 지도자들의 나이와 비교해서도 김일성이 과히 젊지 않았다는 사실은 가짜 김일성론의 이론적 토대가 얼마나 허구에 찬 것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나는 주사파 선배로부터 가짜 김일성론의 허구와 한국전쟁의 세균전설을 들었다. 하나는 ‘사실’이었고, 하나는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해주는 선배의 마음은 둘 다 진정성을 갖고 있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알든 모르든 거짓말을 한다. 어쩌면 악의에 차서 하는 거짓말은 거의 드물고 대부분은 선의에 찬 거짓말로 보는 것이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 더 현실적으로 적합하다고 본다.
이런 사고에 미치게 되면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거짓말의 존재 가능성을 의심하게 된다. 나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베이컨은 신기관에서 우상론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그 근거는 상당히 미약하게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강한 주장을 못하게 된다. 어디서든 주장이 틀릴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덥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간다.
학교에서 상담할 때 느끼는 감정인데, 무엇이든 불확실하게 이야기하는 나보다는 믿고 맡겨달라고 큰 소리 치는 학원 강사에게 의지하는 학부모의 모습을 많이 발견한다. 사회과학자가 보기에는 존재가 의심스런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이야기하는 성직자의 모습에 열광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세상은 의도적 거짓말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거짓말에 의해 더욱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법에서 이야기하는 비난 가능성은 이데올로기적 거짓말보다는 의도적 거짓말에서 더욱 높아진다. 그래서 일반 잡범인 사기꾼들은 법의 철퇴를 받지만, 성직자들이 강단에서 하는 거짓말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회과학을 하다보면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잘 집어내게 된다. 원래 사회과학의 태동이 앞에서 살펴봤듯이 속임에 대한 이용이나 폭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회과학자라면 자신에게 내면화된 거짓말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내 내면에 있는 거짓말을 끄집어 낼만한 통찰과 능력이 있을까?
P.S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절반 만 듣고 들은 것의 절반 만을 이해하며 이해한 것의 절반 만을 믿고 믿는 것의 절반 만을 겨우 기억할 수 있다.” '위선'이라는 비판을 받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써본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