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全,또는統攝의場-종교,철학,과학

[스크랩] 아퀴나스와 다섯가지 신존재증명

한참사랑 2010. 5. 1. 22:24

8. 아퀴나스와 후기 중세 철학

 

- 아퀴나스 중세 최고의 철학 신학자로 일컬어짐.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에게 특히 가장 오해받고 있는 인물. 혹자는 아퀴나스를 많은 지류가 흘러들어가고 나오는 호수에 비유. 혹자는 철학과 계시의 치명적인 분리를 가져온 책임을 그의 탓으로 돌림. 그래서 철학이 성경으로 떠나서 날개를 달고 제 마음대로 날아다니게 되었다는 것. 이 두 입장 모두 잘못된 것. 먼저 아퀴나스에게는 그의 시대의 도전들에 부응하여 보여준 창의성을 인식하지 못함. 후자는 아퀴나스가 보았던 철학의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 아이러니-아퀴나스 자신이 이 두 잘못에 대해 경고했음. 사람들이 계시를 떠나서 궁극적인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자율적인 발판을 철학이 제공해주는 것처럼 여기는 잘못.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진정한 통찰이나 지식이 없다는 식으로 부정하는 태도의 잘못.

 

- 아퀴나스와 그의 시대

 

-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는 남부 이탈리아 로카세카에 있는 그 가문의 성에서 태어남. 그 가문은 쇠락하고 있었던 봉건 귀족 가문. 막내아들. 5살 때 몬테 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조수사가 되었음. 그 가족이 그를 수도원 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에게 바쳤다는 뜻. 어린 나이에 수도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분별할 수 있는 나이에 종교생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는 뜻. 그의 가족은 그가 몬테 카시노의 장래의 수도원장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 그러나 그의 가족들의 정적들 때문에 그 수도원 생활이 불안하게 됨. 14살 때에 나폴리에 세워진 새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보내짐. 여기에서 그는 삼과를 공부. 아마도 아비쎄나의 주석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짐. 이 시기에 아퀴나스는 도미니칸 수도회에 가입하기로 결정. 이 수도회는 프란시스코 수도회처럼 청빈과 순종을 강조했지만, 그들과는 달리 지적인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함. 애초에 가족은 그의 결정에 반대하여 억지로 일년 동안 가족의 성 안에 가두어 둠. 마침내 가족이 마음이 약해져서 토마스는 도미니카 수도사가 됨.

 

- 한 동안 토마스는 파리에서 공부. 그 다음 콜로뉴로 가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서 공부.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킴. 1252년 파리로 돌아와 상 자끄 도미니칸 수도회에서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함. 그 대학은 노틀담 성당 부속학교와 상 빅토르 수도원과 몽스테 제네비브 수도원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 토마스는 성경에 대해, 그리고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 Sentences>을 강의해야 했음. 그러나 점차로 토마스는 당시의 중요한 논쟁들에 이끌림. 이 당시 신플라톤주의가 훨씬 더 알려져 있었고, 플라톤은 겨우 <티마이오스> <파이도> <메노>에 대한 불완전한 번역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었음. 그리고 이슬람 사상가들과 유대교 사상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음. 그들은 거의 2세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종교 신앙의 문제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과 씨름했었던 것. 아퀴나스와 그의 동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더욱 예민해져 있었음.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식 사고방식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사상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슬람 사상가들과 유대 사상가들이 이미 준 대답들이 있었던 것. 아퀴나스는 그 문제에 정면으로 부닥치기로 결심. 스스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게 되고, 이에 대해 광범위하게 씀. 또한 비기독교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직접 연구를 함. 그는 모든 사상들을 엄밀하게 검토하고 사상들의 진리에 마땅한 인정을 해줌. 그러한 진리가 나올 때마다 직접 하나하나 평가를 함.

 

- 1259-1268년 토마스는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가 거기서 여러 개의 도미니칸 수도원들에서 가르침. 이 시기 동안 <숨마 콘트라 겐틸레스> (Summa Contra Gentiles)를 완성하고 그의 대작인 <숨마 데올로기아에> (Summa Theologiae 신학대전)를 쓰기 시작함. 숨마라는 말은 총정리, 핸드북이라는 뜻. 토마스 이전에는 기독교 교리의 진리들을 제시하기 위해 모아놓은 문장들”(sentences)의 편집물이 숨마였음. 이 문장들에는 교회교부들과 여타의 고대 저자들의 증거들이 포함되어 있었음. 그러다가 점차로 숨마가 간결하게 어떤 해당 분야를 정리해서 이 분야의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는 문헌으로 발전하게 되었음. 그렇게 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쓰일 수 있도록 만들어짐. 토마스의 <반이방인론>은 유럽에서 이슬람의 존재에 의해 제기된 문화적 상황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종의 기독교 변증 책임. 슴마 데올리기아에는 성경과 교회 교부들과 고대 및 당대의 철학의 해석에 비추어서 기독교교리를 토마스가 진술한 것임.

 

-1269년 토마스는 다시 파리에 돌아감.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의해 제기된 논란에 휩쓸림. 한쪽에는 아베로이스트였던 문학부 교수였던 브라방의 시제르(Siger of Brabant)가 있었음. 그리고 다른 끝에 파리의 주교였던 스테판 떵삐에흐(Stephen Tempier)가 있었음. 그가 시제르를 정죄하고 또한 토마스가 죽은 후 토마스를 정죄하기도 했음(1277).

 

- 토마스는 1273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신학대전을 작성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성경에 대한 주석을 쓰다가 돌연 1273년 쓰기를 중단.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지푸라기로 보여서더 이상 쓸 수 없다고 말했다 함. 토마스가 뇌출혈이 있었는지 신비적 경험이 있었는지 학자들 간에 논란이 분분. 그 다음해인 49살에 리용에서 열렸던 교회회의에 참석차 가다가 도중에 죽음.

 

- 토마스의 가르침은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칸 수도회 사이의 대립의 문제가 됨. 한 동안 프란시스코 수도회에서는 토마스의 글을 읽지 못하도록 함. 그러나 도미니칸은 공식 가르침으로 수용함. 토마스에 대한 정죄가 곧 풀리고 1323년 그를 성자로 인정함. 그리고 시간이 되자, 토마스를 가톨릭 교회의 공동의 스승으로, 천사 박사로 추앙함. 1879년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물결이 일어났을 때, 교황 레오 8세가 칙서 <영원한 사제> (Aeterni Patri)를 발표. 토마스의 가르침의 영구적인 가치를 주장. 가톨릭 학자들에게 토마스에게서 영감을 얻을 것을 촉구. 그러나 토마스의 지위는 부침을 가짐. 1960년대에는 상당히 낮았음. 그때 교황 바오로 6세가 <신학대전>의 새 판을 출간함. “토마스의 가르침은 도미니칸 수도회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 속한 것이며, 실로 전 세계에 속한 것이다. 단지 중세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특히 우리 시대에 아주 절실하다.”

 

- 토마스는 수백 가지의 글을 씀. 철학적 주석에서부터 찬송가사까지 씀. 구술하는 것을 받아적었던 비서들의 도움을 받음. 그럼에도 그가 여행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업적은 엄청난 것. 그는 도미니칸 수도회가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걸어서 여행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 토마스의 사상 전체를 간략하게라도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 코플스톤과 에띠엔느 질송, 오메아라의 책을 볼 것.

 

- 여기에서는 다섯가지 길과 유비론을 간략히. 나중의 신학의 발전에 중요하기 때문. 다섯가지길이란 다섯 가지의 신존재증명론을 말함. 유비론이란 우리가 하나님에게 단어들을 적용할 때 어떤 종류의 의미를 갖는 것이냐의 문제를 논하는 것.

- 신학대전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음. 1. 신론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감의 문제를 다룸. 2. 만물이 그들의 고향으로서 하나님에게로 복귀하는 일을 다룸. 3. 기독론과 성례론을 다룸. 미완성.

 

- 2부는 다시 심리학, 도덕, , 죄와 은혜를 다루는 첫 부분과 완덕과 악덕, 성령의 은사, 기독교생활, 명상, 실천과 완전을 다루는 두 번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음.

 

- 각 논문은 동일한 기본형태를 취함. 해당 부분에서 토마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명심할 필요가 있음. 첫 번째 부분은 토마스 자신이 앞으로 취할 입장에 대한 한 두 가지 반론들의 형태로 문제점을 진술함. 그 반론들은 비데투르 쿠보드’(Videtur quod) – “… 인 것 같다는 말로 도입됨. 여기에서 아퀴나스는 사물이나 일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들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간략하게 진술함. 그 다음 항목은 세드 콘트라’(Sed Contra) – “그러나 반면에…”라는 말로 도입됨. 여기에서 토마스는 성경이나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권위자가 한 말을 인용함. 이 말들은 앞서 적어 놓은 반론들과 난점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글들. 그 다음 세 번째로 레스폰시오’(Responsio) – “답변이라는 말로 시작. 이 부분에서 토마스는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냄. 처음에는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보이는 일반적인 견해를 진술한 다음에 구체적인 반론과 난점으로 되돌아가서 자신이 해결하는 방식을 보여줌.

 

- 토마스의 진행 방식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님. 그러나 그 엄정함과 간결함은 따를 자가 없음. 그것은 신학작품임.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철학자로 부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가 철학을 믿음을 지적으로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신학 대용물로 여기지 않음. 오히려 철학이란, 쟁점들을 명료화하는 도구인 것. 그렇지만, 그 막대한 분량 때문에, 신학대전은 모든 세대를 위한 구체적인 신학의 최종판이 되지 못했음.

 

- 다섯 가지 증명

- 인쇄된 텍스트로는 세 페이지 분량 밖에 되지 않으나 안셀름의 간략한 존재론적 논증처럼 끊임없는 토론거리가 됨. 신학대전의 1, 질문 2. 아티클 3에 있는 레스폰시오에 나옴.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는 자명하지 않다는 근거에서 앞서 존재론적 논증을 거부한 바 있음.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 자신에게는 자명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명하지 않다는 것.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보듯 직접 볼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효과들이라는 것. 아퀴나스는 이것이 로마서 1 20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라고 이해했음.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그 효과들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그 효과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 사실이 article 3에 있는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끎. 토마스는 먼저 두 가지 반론을 지적. 1. 악의 존재. 만일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 반론은 2. 원인에 대한 우리의 견해들과 관련되어 있음. 만일 자연적인 효과들에 대해 자연적인 원인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사유와 의지의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면, 구태여 더 설명을 찾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 그러므로 어떤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 하나님을 가정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가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 토마스는 세드 콘트라로서 출애굽기를 언급.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WHO I AM). 그리고 다시 레스폰시오로 진행함. 여기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함. 이 다섯 가지 길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작용(causation 인과율), 현실태, 잠재태에 대한 견해에서 끌어온 것임.

- 첫 번째 길: 운동/변화에 근거. 우리 주변의 많은 것이 변화 과정에 있다. 그것은 항상 외부 요인의 결과다. 나무도 다른 것이 불을 붙이지 않는 한 타지 않는다. 물론 나무 자체에 불에 탈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변화도 마찬가지다. 변화의 작인(agent of change)이 있어야 한다. 변화의 첫번째 작인을 하나님이라 이해할 수 있다.

 

- 두 번째 길: 처음과 비슷. 그러나 첫 번째 길의 재진술은 아니다. 운동이나 변화 대신 작용인(efficient causes) 관념을 사용한다. 일련의 작용인들 가운데서 첫 번째 원인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원인 작용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을 것. “그러므로 그 어떤 첫번째 원인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에 대해 모두가 하나님이라 부른다.”

 

- 세 번째 길: 우발적 존재 개념(the notion of contingent being)을 탐구. 세상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것은 영구히 존속하지 않는다. 생겨나고 죽어 사라져 간다. 영구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필연적이지 않다. 그러나 만일 모든 것이 우발적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무한히 쇠멸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마치 무너져 내리는 도미노와 같을 것이다. 첫 번째 도미노가 넘어지기 때문에 넘어져가는 도미노 현상이 생기는 것. 그렇다면 그 첫 번째 도미노를 넘어뜨린 것이 뭐냐? 그것이 있어야 한다.

 

- 네 번째 길: 단계에 근거. 아리스토텔레스적 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의 느낌. 모든 단계적 변화에 반드시 하나의 모범적인 예가 되는 이유/원인이 있다는 것. 뜨거움에는 모든 뜨거움을 보여주며 이유/원인이 되는 가장 뜨거운 어떤 것이 있다는 것. 그 최상/최고의 예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 우주의 궁극적 원인.

 

- 다섯 번째 길: 목적론적 논증. 세계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 자연 가운데 있는 질서를 예로 듦. 자연의 만물은 그 목적을 지향해 나가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다.

 

- 애초의 두 반론으로 돌아감. 악과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양립될 수 없다는 반론?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의 표시다. 그래서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실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선을 끌어내신다. 하나님이 불필요한 가정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유한한 원인들이 유한한 효과들을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결국 그 원인들이 존재하게 한 궁극적 원인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

 

- 이 다섯 가지 길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 적절히 이해하고 유의해서 재진술하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인 토대를 제공해준다는 주장. 반대로 흠 투성이로서 무가치하다는 주장.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논증들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 그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슬람 철학자들, 마이모니데스의 말에 덧붙인 것이 전혀 없음. 토마스 자신이 그 논증들에 대해 큰 열정이 없었고, 단지 당시의 의견을 종합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의견도 나올 정도.

 

-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본다면, 쉽게 여러 가지의 빈틈을 지적할 수 있음. 1. 원동자, 대 설계자로 첫 번째 원인을 보고,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의 문제. 그러나 그 첫번째 원인을 어떻게 원동자나 설계자로 볼 수 있느냐? 그리고 그 원동자와 설계자를 동일인으로 볼 수 있느냐? 그것은 알 수 없음. 나중에 흄이 말함. 여러 신들이 합작했다면? 2. 설계에 대한 논증도 여러 문제를 제기. 어떤 인간도 세계의 목표나 목적을 전체로 볼 수 있도록 세계를 다 바라볼 위치에 있지 못함. 기독교인들은 계시에 근거해서 그렇게 알 뿐임. 물론 토마스가 합리적 성찰에 의해서 우주의 전반적인 목표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님. 단지 그는 우리 경험으로 볼 때 경험 안에 들어오는 만물이 자연 법칙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관찰하고 있을 뿐임. 그리고 예외가 없는 것처럼 보일 뿐. 만일 여기에 진화의 문제를 끌어들이면, 즉시 역설에 처하게 됨.

 

-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진화를 끌어들이면, 우주의 전반적인 목적 개념을 영원히 무너지는 것처럼 보임. 그렇지만, 과학 자체도 세계가 합리적 탐구의 대상에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구조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작동하는 것임. Stanley Jaki, 물분자들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합리성의 구조를 보여줌.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진흙더미, 홍수, 바다도 그 안에 놀라운 합리성을 지니고 있음. 거기에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점들이 있음을 보여줌. 그러나 그러한 자연의 합리성은 볼 수 있는 자들에게만 보이는 것. 아퀴나스의 요지도 마찬가지임.

 

- 그렇다면, 아퀴나스가 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소위 자연이성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의 정초를 놓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으로 토대를 놓은 다음에, 계시가 공급해주는 자료를 통해 믿음으로 나머지 건물을 세우는 소위 고전적 정초론(토대주의)을 세우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결과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임. 그 토대들은 결코 그 건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그런 식으로 생각되는 믿음과 이성이 잘 맞지 않음. 더욱이 이런 견해는 신학대전에 계속해서 언급되는 계시와 믿음에 대한 강조와 잘 맞지 않음. 그 점에 있어서 세드 콘트라에 나오는 출애굽기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씀에 대한 호소와도 다섯 가지 논증 방식이 맞지 않음.

 

- 흔히 지적되고 있는 것은 아퀴나스가 각각의 다섯 가지 논증 방식의 말미에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 마치 그 하나님을 기독교 하나님의 고유명사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검토된 현상들에 의해 전제되는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지칭인 것. E. L. Mascall, 다섯 가지 논증 방식들은 유한한 존재자들의 철저하게 자충족적이지 못한 성격을 보여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그것들을 초월적인 자충족적인 창조적 원인에 의존되어 있음을 보게 만들어주는 다섯 가지의 다른 방식들이라 말함. 유한한 존재의 구조를 성찰하는 이성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원인의 방향을 가리켜줌. 그러나 이 원인에 대한 더욱 ausalfgks 지식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짐. 자충족적인 창조의 원인이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

 

-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아퀴나스는 전제주의자 이상. 그는 폴 틸리히가 말하는 상관성’(correlation)의 방법에도 참여. 그는 철학과 신학을, 이성과 믿음을 서로 연결함. 합리적 철학적 성찰에 문제점들을 분석하는 정당한 역할을 부여 하고 동시에 그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철학과 이성의 영역 바깥에 있는 답으로 제공. 그는 철학도 신학도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제거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음.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간접적이며 불완전. 그렇다고 불가지론자는 아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파악은 언제나 하나님 아닌 것을 매개로 해서 옴. 신적 미스터리는 창조된 질서를 통해서 파악됨. 여기에서 유비론이 나옴.

 

출처 : 청랑정
글쓴이 : 청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