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의 상황에서 씬크레티즘(종교혼합주의) 이해 - 이제민 신부
한국의 상황에서 씬크레티즘 이해
이제민 (마산교구)
1. 번역의 문제
씬크레티즘(Syncretism)은 우리나라말로 보통 ‘종교 혼합주의’로 번역되고 있다. 여기서 혼합이라는 말이 종교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주어 씬크레티즘도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내놓은 선교교령이 ‘씬크레티즘’을 배척한 것도(15와 22) 이 개념이 종교의 혼합주의로 이해된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한국 천주교회가 최근 종교다원주의를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보고 경고한 것도 씬크레티즘이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흐린다고 본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개념이 종교사에서 종교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종교 혼합’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이 개념을 단순히 ‘종교 혼합주의’로 번역하는 것은 미흡할 뿐만 아니라 종교간 만남을 위해서도 유익하지 못하다. 이 개념을 부정적으로 이해한 배경을 살펴보아도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부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씬크레티즘’은 혼합과 순수성에 대한 물음 이전에 인간들의 삶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개념이 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검토한다면서 혼합 자체에 긍정적인 의미를 주고자 하는 것도 난센스이다. 종교 혼합이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 단어의 역사적 배경과 단어의 생성배경을 이루는 인간의 삶이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삶은 다른 종교(문화)와의 만남이 종교의 본질임을 시사하고 있다. 종전에는 자기와 이질적인 요소는 자기 종교의 원천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최근 유럽 밖에서 발달한 신학은 이질적인 요소와 만나는 과정을 종교의 원초적인 사건으로 본다. ‘씬크레티즘’은 종교의 정체성을 찾아준다.1)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씬크레티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종교사적으로 볼 때 모든 종교의 상징체계는 주변환경과의 만남(교환, 스며듦)을 통해 발전한다. 씬크레티즘은 “종교변천의 특수형태”2)이며, 종교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발판이다. 왜냐하면 종교간 또는 문화간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컨텍스트 안에서만 종교의 정체성이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종교를 이상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시간을 초월한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을 피하게 한다. “씬크레티즘의 역사에서 자유스러운 종교 형태(예컨대 신약의 그리스도교)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다.”3) 모든 종교는 교의적으로 씬크레티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종교사회를 이루고 있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구의 그리스도교도 씬크레티즘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들어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씬크레티즘의 과정을 거치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일인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의미까지를 담고 있는 이 개념을 어떻게 우리나라말로 번역할 것인가? 무엇이라 한마디로 번역할 수 없어 - 더군다나 단순히 ‘종교 혼합주의’로 번역할 수 없어 - 이 논문에서는 일단은 ‘씬크레티즘’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4) ‘코리언 타임’을 코리아와는 상관없이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타남”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듯이 ‘씬크레티즘’이라는 단어도 이 단어를 낳게 한 크레타와 상관없이 “종교 혼합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할 수밖에 없다. 코리언 타임을 굳이 “한국식 시간”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면 “씬크레티즘”은 “크레타식 행동방식”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기초신학자 E. 클링어는 이 개념을 ‘종교들의 스며듦’(Durchdringung der Religionen)으로 번역하였다. 이 스며듦은 종교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스며들어 화해와 조화를 그 본질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크쉬스는 ‘씬크레티즘’을 종교들의 교환과정(Austauschprozess)으로 이해하며 그렇게 번역하고자 하였다.5) 나 개인으로는 불교의 ‘화쟁’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화쟁의 ‘쟁(諍)’은 다양성을 제시하고 ‘화(和)’는 일치를 제시하지만, 단순히 諍을 和하는 것만은 아니라 ‘쟁’과 ‘화’가 하나의 단어(화쟁)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6) 화쟁 개념은 ‘씬크레티즘’을 새롭게 이해하는 지평을 열어주며 나아가 종교들이 - 종교라면 - 처음부터 다른 종교문화와 서로 스며들고 서로 교환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며, 그 지평에서 종교간 대화와 각 종교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7) 한국에서의 종교 씬크레티즘을 보기 위해 먼저 이 개념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다.
2. 유럽의 맥락에 나타난 씬크레티즘
“씬크레티즘”이라는 단어는 플루타르크(50-125년)가 처음 크레타인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용했다: 크레타인들은 자기네들끼리 전쟁을 하다가도 외부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 협력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안으로 서로 싸우다가도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그때까지의 적대감은 묻어두고 서로 협력하는 크레타인의 행동방식을 “씬크레티즘”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다.8) 이 개념을 중세에 에라스무스가 교파간에 내면적으로 대립하다가도 정치적으로는 밖으로 제휴하는 그리스도인을 빗대어 부정적으로 사용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외부의 위협이 있으면 서로 협력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원수지간으로 남아 있는 짬뽕이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이 단어는 “서로 원수지간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용된다. ... 그렇게 우리 시대에도 평상시는 견원지간이다가도 동맹을 맺는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복수하고픈 감정이 그렇게 큰 것이다”9). 이런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씬크레티즘은 진짜가 아닌 가짜 협력이며, 최종적이 것이 아닌 임시적인 협력이다. 당초 서로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합친 것이다. 씬크레티즘은 종교간 차이를 흐리게 하여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서 결국 역사적 신앙을 포기한 사람, 기존의 종교를 벗어나 종교일치를 추구하는 자를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10)
19세기에 이르러 씬크레티즘은 종교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가 주변의 종교세계와 내면으로 맺어진 관계를 들여다보게 되면서, 그리고 주변의 종교 문화를 경계하거나 수용하는 과정에서 찾게 된 자기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11) 예컨대 헬라의 씬크레티즘을 일정한 역사적 전제 아래서 교환과정을 통해 일어난 ‘순수’ 종교 현상으로서 이해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헬라의 씬크레티즘을 ‘고전적’ 그리스의 타락으로,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타락과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상실로 보려는 견해에 반대하여 씬크레티즘을 ‘종교 전통을 충만케 해주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종교는 문화와 사회 상황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런 문화 사회에서 종교적 요인의 교환은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인식이 씬크레티즘을 긍정적으로 고찰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씬크레티즘을 자기 종교의 정체성이 파괴되는 것으로 보고 다른 종교와의 교환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보이는 메카니즘적인 현상은 여전하다. 이런 현상은 자기 종교의 체계와 교리를 강조하는 고등종교일수록 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들 고등종교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다른 종교와 교환하고 받아들이는 작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른 종교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경쟁적인 다른 종교가 제시하는 상징체계를 모방하거나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공경도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그런 과정을 거친 결과이며, 로마의 태양 축제일인 12월 25일에 예수 탄생일을 보내는 것도, 전례 중 장궤하는 것(게르만의 의식)도 다른 문화 종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도 예외는 아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교환 가능하였다.12)
3. 한국의 맥락에 나타난 한국적 씬크레티즘
3. 1. 한국적 씬크레티즘
한국은 크레타가 아니며 더군다나 서구 유럽에 위치한 나라중의 하나도 아니다. 따라서 한국의 종교상황도 유럽과는 다르다. ‘하나’의 종교 - 그리스도교 또는 이슬람 -에 익숙한 유럽과는 달리 한국사회는 처음부터 다종교사회이다. 유럽이 단일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사회를 강조한 데 반해, 한국은 여러 종교가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유럽이 사회의 통합을 위해 하나의 종교를 필요로 하고 그 때문에 다양한 종교를 관용할 수 없었던데 반해, 한국은 사회의 통합을 위해 하나의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종교간의 만남과 교환이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그 만남 위에서 삶이 펼쳐졌다. 유럽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불린데 반해 한국은 한번도 어느 한 종교의 국가가 되어 본 적이 없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종교간 전쟁도 없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거룩한 전쟁(聖戰)이란 더더욱 상상 할 수 없다. 유럽에서는 종교의 분열이 곧 사회의 분열이고 반대로 사회의 분열이 종교의 분열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다원성이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교파가 공존하였다.13) 한국이 다종교사회인 것은 단순히 여러 종교가 공존한다는 현상을 넘어 한 종교 안에서 여러 종교가 서로 만나고 있다는데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다른 종교와 융합되지 아니한 ‘순수한’ 종교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다. 유럽과는 다른 한국의 씬크레티즘을 ‘한국적 씬크레티즘’ 또는 ‘씬코리아니즘’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종교다원 현상은 지리적인 의미를 넘어 인간학적인 의미로도 이해된다. 이 사회에 사는 인간들(의 삶)이 종교 다원적으로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한 인간 안에서 여러 종교가 만나고 있다. 이것은 유럽인에게는 불가능하다. 유럽에서는 한 인간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이 동시에 이슬람교도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불자가 동시에 무속인일 수 있다.
유럽 씬크레티즘이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하나’의 종교, ‘하나’의 사회가 강조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이것이 곧 그리스도교를 관용적이지 못한 종교라는 인상을 준 계기가 된다. 이런 배타성과 인색함은 한국의 종교사회에서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종교란 다양한 양상으로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기를 준다. 그래서 민중의 수만큼 종교는 다양할 수 있게 된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종교’가 자연스럽게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위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아래 민중으로부터 이해된다.
3. 2. 화쟁: 한국적 씬크레티즘의 장소 (1)
한국적 씬크레티즘의 바탕은 화쟁에서 읽을 수 있다. 원효는 기신론에서 이렇게 쓴다. “‘같음’(同)이란 무엇인가? 같음은 다름(異)으로부터 설명된다. 다름이란 무엇인가? 다름은 같음에서 밝혀진다. 다름에서 같음이 설명된다는 것은 같음이 다름으로 분열되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같음이 다름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다름이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같음이 다름의 융합이 아니기에 같음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다름이 같음의 분열이 아니기에 다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다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같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같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음으로 다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이 둘은 둘이 아니며 구별할 수 없다.”14)
한국은 이 바탕에서 종교를 이해하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였다. 원효는 이 바탕을 화쟁(和諍)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원효에 따르면 ‘쟁(諍)’은 다양성을 제시하고 ‘화(和)’는 일치와 조화를 제시한다. 이는 諍을 和하는 것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안으로는 계속 쟁이고 겉으로는 화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화와 쟁, 하나와 여럿, 다양성과 일치, 절대성과 상대성은 표현상으로는 상반되는 것 같지만, ‘쟁’과 ‘화’가 화쟁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쟁과 화는 하나의 단어를 이루며, 이 하나의 단어에서 한국인의 심성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쟁과 화는 한국인의 심성에 자리하고 있는 ‘한 개념’에 대한 ‘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성과 일치, 배타성과 포용성이 조화를 이룬 화쟁의 바탕에서 한국의 여러 종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의 원초적 종교라 할 수 있는 무속 종교와 만나는 과정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한국에 들어온 외래종교들은 무속 종교와 만남을 통해 그 종교가 발생한 곳과는 다른 변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도불교와 한국의 불교가 다르고, 중국 유교와 한국의 유교가 다르다. 전통적인 무속의 산신신앙이 불교의 사찰에 모셔져 있는 것도 이런 경우이다. 이런 현상은 이들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심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15)
화쟁의 바탕에서 이해한 한국적 씬크레티즘은 종교의 정체성을 파괴함이 없이 종교의 정체성을 찾아준다. 종교를 화해와 조화의 종교가 되게 한다. 종교는 하나의 신앙체계로서 신앙의 외형에 머물러 다른 종교 체계에 대해 배타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혼합의 의혹을 줄만큼 포용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한국에 들어온 종교들은 화쟁의 바탕에서 종교의 의미를 흐리거나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함이 없이 그 정체성을 찾아주는데 기여하였다. 화쟁은 이렇게 ‘종교 혼합’이라는 표현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씬크레티즘을 각 종교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종교다원사회이기에 관용적이고, 유일신론을 바탕으로 한 종교 단원사회(Monoreligion)이기에 배타적이라는 주장은 옳은 것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배타적인 사회이기에 화해와 조화가 더욱 강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의 종교에서 화해와 조화가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한국의 사회가 결코 단일 종교로 나타날 수 없는 배타적인 사회에서 빚어진 역사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다종교 사회가 관용적이고 유일신론에 바탕을 둔 단원종교 사회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종교란 본래 다종교적이고 씬크레티즘적이기에 관용적일 수밖에 없다. 배타성과 관용성은 외적인 사회적 요소로 인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을 구체화하였는가 못했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다. 화쟁에 근거하여 전개된 한국의 종교들은 이런 구분을 모른다. 화해와 조화를 추구한 한국의 종교들은 처음부터 다양한 삶과 가르침의 논쟁 속에서 성장 발전하였다.
3. 3. 경험적 현세세계: 한국적 씬크레티즘의 장소 (2)
종교의 씬크레티즘적 형태는 현세적 삶이 강조된 일상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상의 삶에서는 종교의 상호교환이 일어나며 나아가 종교의 변형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난다. 종교의 교의(도그마)도 종교의 틀이 아닌 그 이면에 담긴 인간들의 삶을 제시한다. 예수는 그런 교의를 넘어 인간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분에게는 인간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이 인간을 위하여 있다. 한국에서는 원효가 그런 삶을 추구하였다. 원효의 불교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불교를 화쟁의 바탕에서 이해한 때문일 것이다.
화쟁은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경험적 현세세계(Experiential This-wordlism 또는 Experiential Realism)16)가 종교의 장소임을 제시한다. 한국에 들어온 종교들이 한국의 문화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은 삶의 현장인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세세계의 생활지혜를 근거로 영원한 지혜를 캐내는데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이흠에 따르면 이런 경험적 현세세계의 특징은 선험적 사상체계를 반영하지 않고 경험적 현세세계의 생활지혜를 근거로 일상에서 추구하는 꿈과 이상을 추구한다.17) 삶의 현장에서 당면하는 사랑과 이별의 경험을 소박한 경험의 맥락에서 노래할 줄 아는 이들은 부처와 공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마음을 비우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불교사상과 거리가 멀고, 도덕적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유교와도 거리가 멀다.”18) 이들이 만들어내는 경험적 현세주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수많은 역사적 역경과 수난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19)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에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특정 종교의 선험적 신념체계에 의지하기도 한다. 이리하여 이들은 “경험적 현세주의의 맥락에서 ... 여러 종교사상들을 포용하고 서로 혼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관념들”을 만들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한 사회를 대표하는 특정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여러 종교들을 수용하면서도 전통적인 문화가 보존되고 있는 것이 이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스도교는 한국의 이런 씬크레트즘의 과정 속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즉 한국적 그리스도교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들어온 다른 모든 종교처럼 자기가 씬크레티즘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음을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교리가 삶에 바탕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20) 하늘나라 복음이 현세의 경험세계를 위한 것임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21) 씬크레티즘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교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토착화는 씬크레티즘의 과정에서만 가능하다.22)
씬크레티즘과 함께 종교의 순수성과 정체성에 대한 물음도 새로 던져진다. 다른 종교와의 만남을 모르는 순수하게 자기 것만 가지고 있는 종교,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모르는 순수하게 자기 것만을 가지고 있는 문화는 없다. 종교는 늘 인간의 삶과 관계하고 인간의 삶은 만남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나는 곳에는 종교도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간의 만남은 삶의 만남이다.23) 인간의 삶이 본래 씬크레티즘적이듯이 종교 또한 본래 씬크레티즘적이다.24) 종교적 씬크레티즘이 이야기되는 고향은 그러므로 종교를 통하여 삶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씬크레티즘은 종교를 인간적으로 다룰 뿐만 아니라 종교에 인간의 생명을 부여하며 종교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 ‘삶을 위한’ 종교로 이해하도록 해 준다. 씬크레티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종교는 생명을 얻을 것이며 나아가 “종교간의 만남”을 종교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근본 개념임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살아남은 모든 종교는 이렇게 - 설사 이 대화를 여러 이유를 대며 거부했다하더라도 - 씬크레티즘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모든 종교는 피할 수 없이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 서로 만나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인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씬크레티즘을 거부하는 종교는 자기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일상에서 전개되는 삶에 나타난 조화의 이상을 간과할 때 종교는 배타주의와 근본주의의 탈을 쓰고 나타나게 되며, 이 때 교의는 종교의 틀을 방어하고자 타인을 공격하는 이론적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4. 씬크레티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
4. 1. 씬크레티즘 언어
같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더라도 고백하는 자에 따라 그 느낌과 색깔이 다르고, 마리아를 공경하는 양상도 민족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가톨릭 신앙 안에서도 독일인 가톨릭 신자와 이태리 가톨릭 신자 그리고 미국의 가톨릭 신자의 신앙 형태가 다르다. 사람마다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펼쳐졌다. 이 사실은 아무리 ‘하나’의 가톨릭, ‘하나’의 교회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신도들의 삶은 씬크레티즘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교가 씬크레티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과 유럽 그리스도인이 다 같이 한 그리스도교 안에서 한 분 삼위일체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이 다른데서 그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하느님’(Heaven, Himmel)께 기도할 때와 유럽인이 데우스(Deus)나 ‘곳(God)’에게 기도할 때의 느낌은 같을 수 없다. ‘하나’의 고백이라 하지만 신앙행위는 민족과 언어와 종족과 나라마다, 어쩌면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한국인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지만 유럽인은 삼위일체 ‘하느님(Himmel)’이 아니라 삼위일체 ‘곳’(God)에게 신앙을 고백한다. ‘곳’과 ‘하늘’의 차이만큼 이들의 신앙행위와 신앙에 따른 삶의 양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각자가 자기의 언어로 빚은 하느님 상은 다르지만 ‘비슷하게(synonym)’ 사용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다른 두 언어를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질문: 한국인이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기도하듯이 유럽인도 ‘하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고백하며 기도할 수 있을까? 유럽인이 삼위일체 ‘갓’에게 기도하듯이 한국인도 ‘곳’에게 기도할 수 있을까? 만일 개념의 공생이 종교적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면, 한 이름이 다른 이름(異名; synonym)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한 종교 안에는 늘 씬크레티즘의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즉 종교는 원래부터 씬크레티즘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클링어는 이를 뒷받침하여 이렇게 쓴다. “물, 나무, 지옥, 산은 어디에나 있다, 이들은 모든 종교의 원초적 상징이며 씬크레티즘을 표현하는 장소이다. 의식, 신화, 건축양식도 이와 비슷하다. 씬크레티즘은 종교의 특징짓는 표시 그 자체이다.”25) 그러므로 이런 개념을 알고 있는 종교는 씬크레티즘적이며 그리스도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데우스’가 문화권에 따라 ‘곳’으로 또는 ‘하느님’으로 불리는 것을 자기 정체성을 찾아주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권에 따라 달리 불리는 하느님의 이름처럼 전례도 달리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 2. 씬크레티즘 종교의 토대로서 복음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신앙의 종교로서 배타적인 인상을 주지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따라 볼 때 본래는 관용적인 종교이다. 서로 상반되는 하늘과 땅의 만남을 복음으로 선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은 겨자씨가 땅에 뿌려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듯이 천국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선포한다. 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종교와 문화가 씬크레티즘적으로 만나는 세상에 뿌려져있음을 안다. 즉 다른 종교문화와 만남을 그 본질로 하고 있으며 이들과 공생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는 고대종교와의 공생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면서 고대 종교의 신을 예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고대종교의 전통선상에 머물러 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교는 그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종교 특히 고대종교와 공생의 길을 걷고 있다. 씬크레티즘은 이렇게 늘 그리스도교가 새롭게 태어나는데 작용했다.26) 과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래에도 그리스도교는 시대를 초월하여 늘 다른 문화와 종교와 늘 새롭게 만나며 새로운 그리스도교로 거듭 탄생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씬크레티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데에는 - 그래서 밖으로 배타적인 인상을 주는 데에는 - 그리스도 홀로 구원자라는 그리스도의 절대성에 대한 물음이 작용하고 있다. 이에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씬크레티즘의 사회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근본적인 질문으로 떠오른다. 이 절대성이 씬크레티즘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이 될 수 있을까?27) 씬크레티즘의 세계에서도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우리의 주제를 벗어난 것이기에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하늘나라가 지상에 왔다는 그분의 복음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4. 3. 그리스도교의 씬크레티즘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
오늘날 우리가 씬크레티즘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구약에도 이미 알려져 있다. 십계명 중 첫째 계명(유일신)과 이 계명이 함축하는 것들(야훼 외 다른 신의 거부, 우상숭배 금지 등)은 ‘다른’ 종교를 부정하고 있다.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 여기서는 씬크레티즘으로 이해되고 있다.28) 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는 이웃 종교와 문화를 배척하면서도 그들을 받아들인 종교현상을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씬크레티즘 현상은 모세의 유일신 종교에 가나안의 다신론적 종교가 파고든 데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가나안의 종교를 자연적이고 다신론적으로 본 것과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역사적이고 유일신론적인 신앙을 지킨 것으로 보려하지만,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모세의 유일신론의 틀이 가나안의 종교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바알 신앙으로 시달려야 했다.29) 교환 과정이 정치적으로 일어났고, ‘다른 것’에 대한 방어도 점점 심하게 나타났고, 이런 수용과 거부의 결합과정에서 씬크레티즘의 과정이 늘 진행되었다. 에제키엘이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멸망의 역사로 보면서 비판한 것도 역설적으로 그런 씬크레티즘의 현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약 이후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 문화권과 논쟁하면서 유다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헬라의 문화권에 전파되면서 스스로 씬크레티즘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선포한 것을 넘어 전개되었고, 구약성서가 아니라 유다-헬레니즘과 헬라-동양적인 영향을 받았다.(사전, 533) 신약성서 안에서도 씬크레티즘과 관련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들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하느님의 아들, 주님(Kyrios), 구세주(Soter)와 같은 그리스도의 칭호들이다. 이런 개념들은 구약성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동정잉태도 그렇다. 판넨베르크가 씬크레티즘을 한 종교의 자기주장 방식과 적응방식 (Weise der Selbstbehauptung und Anpassung einer Religion)으로 이해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씬크레티즘적 동화력(synkretisische Assimilationskraft)을 가진 종교의 대표적인 예로 보고, 쉬파른이 그리스도교를 현상학적으로 씬크레티즘적 종교(synkretistische Religion)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면에서 타당하다.30)
콘스탄티누스 이후, 종교적 요구가 정치권력으로부터 해방되고, 비그리스도교 문화를 서구적으로 변형하면서 또는 세속적 방식이 그리스도교에 원천을 둔 것처럼 표현하면서 토착화의 환경도 바뀌었다. 서구 그리스도교는 씬크레티즘이라는 용어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씬크레티즘의 영향권 안에서 발전되었다. 제삼세계의 문화 종교와 만나면서 씬크레티즘 논쟁이 다시 일고 있다.
5. 한국의 씬크레티즘 종교
유교와 불교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로 긴 역사와 여러 문화를 통해 잘 정비된 교리와 사상체계의 형태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이들은 역사의 옷(문화와의 만남의 옷)을 입고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모든 이념과 현상은 역사적인 옷을 입고 완성된다. 역사적인 옷을 입지 않은 현상은 오직 상상과 관념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중국과 서양의 역사적인 옷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종교성만이 이 땅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중국 불교, 서양 그리스도교가 그들의 옷을 입은 채 이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모든 종교현상은 그렇게 기존의 역사적인 옷을 입고 있는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렇게 외래 종교는 이 땅에 전달되면서 이 땅의 문화와 이 땅의 종교를 만나 이 땅의 역사 안에서 다시 한국 불교, 한국 유교로 변형되며 토착화되었다.
한국에서의 이 변형은 종교 자체의 성격(본질)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종교성과도 관계한다. 즉 종교의 변형은 변형을 본질로 하고 있는 종교와 그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의 종교심성이 만나 이루어낸다. 여기서 한국인의 종교 심성이란 ‘다른 것’에 대해 배타적으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과 논쟁하는 마음이다. 즉 한국인의 종교심성은 변형될 수 없는 특정 종교적 관념이나 종교적 이상, 또는 교의와 지혜나 단순히 이들을 종합한 것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하나의 유기적인 사상체계로 수용하거나 또 변형시키는데서 나타난다.31) 한국에 들어온 종교와 문화는 스스로 변형되면서 다른 종교와 문화를 변형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한국 고유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외래사상과 어떤 형태로든 점진적으로 융합된다. 씬크레티즘적으로 작용한다. 이리하여 한 종교가 한국에 발을 디딜 때마다 새로운 종교, 신흥종교가 생겨나기도 한다. 씬크레티즘 종교의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이런 종교 형태는 삶에 대한 이론보다는 실질적인 삶을 제시하며 이로써 민중을 자기에게 이끈다. 신흥종교는 씬크레티즘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씬크레티즘 사회에서는 종교와 문화의 만남이 관용적으로 일어난다.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행위가 나올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윤이흠의 다음 견해는 타당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흔히 한국의 유교가 불교를 억압했다고 하고 유교가 가톨릭을 박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교라고 하는 문화전통은 불교라는 문화전통을 억압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톨릭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문화전통은 유교라고 하는 문화전통에 의해 박해를 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유교를 믿는 신봉자가 불교를 믿는 신봉자를 억압하고 가톨릭을 믿는 신봉자를 박해할 수 있을 뿐이다.”32)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유교를 옳게 신봉하는 자는 남을 박해할 수 없다. 박해하는 자는 자기 종교의 이념과 전통을 옳게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것을 자기의 몸으로 소화해내지 못한 때문이다. 박해(검열)는 근본주의자의 행태일 뿐이다.
한국인은 배타성(諍)과 관용성(和)의 화쟁에 근거하여 고유사상과 외래 종교의 융합을 이루어내면서 종교는 그 자체로 결코 배타적일 수 없다는 것을, 화쟁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의 100년간 지속된 한국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불행하게도 그리스도교든 유교든 종교가 화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데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 씬크레티즘의 하느님
6. 1. 데우스, 곳, 갓, 하느님
서양 종교(문화)와 한국 종교(문화)의 만남에서 제일 크게 작용하는 문제점은 언어와 함께 전문용어의 번역이다. 한 문화권의 언어를 다른 문화권에 정확하게 옮기는 일이 가능할까?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형성된 神 개념인 데우스나 그리스도를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온전하게 한국의 종교 문화권에 번역할 수 있을까? 이 개념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자 말자 서구에서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용되는 것은 아닐까? 방금 나는 ‘神’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동양에서 말하는 ‘신’이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데우스(Deus)나 곳(God)과 과연 동일한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동양에 들어오기까지 동양인은 데우스도 그리스도도 몰랐다. 이 데우스를 이미 동양에 있는 개념 중에서 신이나 하느님을 선택하여 번역하였다고 하여, 데우스가 이미 동양에서 말하고 있던 신이나 하느님과 동일하며 또 반대로 신이나 하느님이 데우스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데우스를 신이나 하느님이라는 단어로 옮겨 사용할 때, 데우스는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던 데우스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축소시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 때 신은 더 이상 동양에서 지금껏 말해오던 신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용어들은 편리상 그렇게 기존의 단어를 사용했을 뿐 한 종교의 개념을 이미 기존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언어로는 더 이상 적절하게 번역되거나 옮길 수 없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33) 사실 데우스를 신으로 번역하면서 동양인은 여태껏 던져 본 적이 없는 “신은 존재하느냐, 하느님은 존재하느냐?”하고 질문을 던지고는 이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 신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수입’될 때 ‘데우스’도 함께 수입되었다. 게르만 언어로 ‘곳’(Gott, God)으로 번역된 데우스를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데우스라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경우 그리스도교는 외래 서양종교로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데우스는 한국의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토착화에 관심을 가진 선교사들은 고심 끝에 天主(하느님)라는 개념을 선택하였고, 이에 따라 가톨릭도 천주를 믿는 교회라 하여 천주교(Religion of the Heaven)로 번역되었다. 천주는 순 한국어로 ‘하느님’이기에 그 후 천주와 하느님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천주에 비해 신(神)은 영(靈), 초자연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신론의 의혹을 준다. 근세에 들어서서 - 서구의 영향을 받아 - 이 개념은 ‘신은 존재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보듯이 철학적이거나 ‘신이여’ 하는 표현에서 보듯이 문학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실제 종교의 삶에서는 ‘신’이라는 단어보다는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더 즐겨 사용한다.
한국에서 하늘은 땅의 대립개념을 넘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늘은 인간의 마음을 무한으로 열어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하느님의 무한성과 초월성을 나타낸다. 하늘은 인간존재를 초월한 초월적 존재이며 인간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만나는 내재적 존재로 체험된다. 하지만 땅 없이 하늘에 대한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하늘과 땅은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우주적으로 일치를 이룬다. 하늘과 땅은 ‘하나’의 개념(천지)이다. 이제 데우스가 한국에서 ‘하늘’과 관련하여 불리운다면 한국인은 데우스에서 하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데우스를 하늘로 부를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는 한국인의 하늘을 삼위일체적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 되며, 나아가 하늘을 하느님 또는 천주라고 부르면서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천주’라는 번역에서 동양의 종교성과 서양의 종교가 어떻게 만났는지를 보게 된다. 서양의 종교가 동양에 어떻게 번역될 것인가 또 동양의 종교가 서양의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전형을 만나게 된다. 데우스가 기도 중에 한국에서 하늘로 불린다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늘(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데우스에게 기도하는 서양인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그 반대가 일어난다면, 서로 다른 이름(하늘과 데우스)을 부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살도록 기도한다면, 이 개념은 이미 씬크레티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늘(천)은 한국의 역사에서 이미 씬크레티즘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어 왔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의 만남의 장소로 이해되는 ‘하늘’에 대한 신앙을 가져 왔다. 한국의 종교심성이 하늘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건국신화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 의식에 나타나며, 이 신앙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하늘’은 인간이 빌면 복을 내려주는 지존으로 흠숭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온 외래 종교들은 이런 종교심성의 바탕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때그때마다 하늘도 수입된 종교의 언어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늘의 융합적인 면을 보게 된다. 유교가 들어왔을 때 하늘은 유교식 설명을 따라 천, 天帝, 上帝, 上主, 上帝 등과 동일시된다. 불교가 들어 왔을 때 하늘은 이미 중국에서 토착화된 불교를 받아들인 불교식의 모습을 지닌다. ‘사크라 데바남 인드라’(Sakra Devanam Indra)를 제석천으로 받아들인 것이 그 예다. 제석천은 33천주의 하나로서 하늘세계에서 가장 높은 신이지만 부처보다는 지위가 낮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을 때 데우스는 한국인 고유 심성에 나타난 하늘 신앙의 바탕에서 받아들여졌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의 신앙인들은 이렇게 자기 방식으로 하늘에 고백하고 기도하였다. 그 고백의 양상은 다를지라도 그들은 ‘하늘’에서 내면적으로 서로 통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그리스도인이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신앙을 고백할 때 그들의 의식 속에 이 하느님은 씬크레티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의 의식에는 유불선 조상이 기도했던 그 하늘이 -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 마음속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느님은 단군의 하느님이요, 天帝, 上帝, 上主, 上帝요 제석천이다. 그분은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우주만물을 조성하고 상선벌악하시는 분이다. 미사를 흔히 제사로 표현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조상이 하늘에 드리는 제사의 느낌을 갖게 한다. 결국 하늘 개념 또는 하늘 신앙이 있었기에 한국인은 다른 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 종교들은 또 서로 일상에서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34) 방금 말한 것은 하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종교 다원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에 대한 신앙이 한국의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여질 때 즉 데우스에 대한 신앙이 한국에서 하늘에 대한 신앙으로 표현될 때, 하늘을 만물을 다스리는 주재자로 받아들이는 점까지는 일치할 수 있지만 하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생기게 된다. 하늘에 대한 한국의 신학이 서구에도 가능할까 하는 물음이 던져지는 것이다. 데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하늘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씬크레티즘을 받아들일 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비로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천주’로 부르며 인격적으로 기도하게 된 것은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35) 그리스도교는 하늘 ‘천’에 ‘주’(Herr, Lord), ‘하늘’에 ‘님’(=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첨가시킴으로써 하늘(천)을 인격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나아가 데우스를 천주라고 부르게 함으로써 하늘을 창조주, 삼위일체로 받아들이게 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하늘을 삼위일체 데우스로 받아들인 것을 무속과 불교 유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도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에 이미 들어온 다른 종교들도 하늘을 인격신으로 창조주로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하늘이 안다”, “하늘이 무섭지 않는가?” 등의 표현에서처럼 하늘 개념에서 인격적인 면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삼위일체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시도이다.
방금 던진 질문은 서구의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된다. 서구에서도 데우스가 하늘로, 하느님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이 두 언어를 동일하게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까?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하늘(하느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바치는 고백이 서양의 그리스도인이 데우스(God)에게 삼위일체적으로 바치는 고백과 동일한 것일까? 기도하는 그들의 마음이 같을까?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이제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익숙해 있다. 이 질문을 서양어로 그대로 옮기면 “하늘은 존재하는가?(Existiert der Himmel?)”이다. 서양인도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그들도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하늘이여”하며 하늘을 찬미하고, 데우스 흠숭하듯 하늘을 흠숭할 수 있을까? 역으로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에게 기도할 때 서양의 데우스를 생각하느라고 본래 지니고 있던 동양의 하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데우스도 하늘도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물음에 답변할 수 없다면 하느님은 동양의 하늘과는 상관없는 그저 데우스의 다른 명칭일 뿐이다.36) 결국 데우스를 하느님으로 번역한 데에는 동서양 모두에게 도전이다. 동양은 아직 하늘(신)을 삼위일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서양은 하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고백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데우스 개념을 만나면서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하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됨으로써 하늘과 데우스 개념은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서로 변형된 모습으로 자기에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든 서양의 그리스도인이든 씬크레티즘의 문제를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우선 한국의 하느님이 단순히 데우스를 부르기 위한 기호가 아니라면, 그래서 더 이상 하늘이라는 뜻을 무시하고 부를 수 있는 기호가 아니라면, 한국인이 하느님에게 바치는 기도가 서양인이 데우스에게 하는 기도와 같은 것이라면, 그들은 서로 다른 이름이긴 하지만 ‘한’ 하느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고 믿고 있다면, 그 반대도 성립해야 한다. 데우스를 믿는 서양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제 한국인처럼 하늘(하느님)에 삼위일체적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서로가 이렇게 다르게 부르고 다르게 생각하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서로는 서로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동서양간에 씬크레티즘의 만남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데우스로 동양의 하늘에게 세례를 주었고 동양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으로 유럽의 하늘에 세례를 베푸는 일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도 이제 더 이상 “신은 존재하는가?” (Gibt es Gott? Existiert Gott?) 따위의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부질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늘이 존재하는가?”(Gibt es den HImmel? Existiert Himmel?) 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37) 한국인이 종전에는 한번도 던져 본 적이 없는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서구인이 던진 “Existiert Gott?” 이라는 형태로 질문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수입된 질문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진리에 대한 물음이 감추어 있다. 하느님과 데우스는 인간의 언어놀음의 대상일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듯 데우스도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다. 그러기에 하늘과 데우스는 삼위일체적이다.
종교간의 만남은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권과 다른 문화권 안에서 씬크레티즘의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데우스에 대한 신앙 안에서 양 문화권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서로 변화를 일으키면서 만나고 있다. 데우스가 다른 어떤 개념이 아닌 ‘천주’나 ‘신’으로 번역된 데서 문화의 교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6. 2. 신론의 과제
씬크레티즘의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며 종교의 과제를 제시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동양의 하늘, 하느님, 신을 데우스의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승화시켰고 그런 차원에서 신앙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과제를 느끼지 못했다면 동양의 언어(문화)를 사용은 하였다 하더라도 (데우스를 하느님으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형식적으로 사용만 하였을 뿐 내용적으로는 토착화한 그리스도교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데우스를 번역하기 위해 왜 하필이면 하느님, 천주, 신이라는 단어를 썼는가 하는 고민 없이 토착화한 그리스도교는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 천주, 신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데우스를 번역하기 위하여 사용한 형식적인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각과 문화와 삶을 드러내는 총체적 개념인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는 이들 개념(천주, 하느님 등)들이 우연히 선택되어 사용된 단어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데우스를 한국의 상황에서 믿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이 (데우스를 위한) 기호가 아니라 실제로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할 있어야 하고, 하늘(하느님)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고백이 실제의 삶에서 나온 것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은 ‘기호’, 죽은 문자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하느님’에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 바오로가 아레오파고 신전에서 한 연설을 빌려서 말하자면 ‘하늘’(알지 못하는 신)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깨달아 고백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한국의 신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데우스를 천주라고 부르게 됨으로 동양인은 하늘(천)을 아버지, 창조주, 전능하신 분, 삼위일체로 고백하게 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하늘에 삼위일체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앙을 고백된(The Trinity Heaven, Der dreifaltige Himmel) 것은 동양에서뿐만 아니라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틀어 없었던 일로 새로운 시도이다. 데우스를 믿는 서양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제 한국인처럼 ‘하늘’에게 삼위일체적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들도 가톨릭을 천주교(Religion of the Heaven)라고 부를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교의의 발전이다. 이로써 하늘뿐만 아니라 땅에게도, 인간에게도 모두에게 삼위일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도 의도하신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너희가 너희 이웃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해준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해드린 것이라는 것은 일상에서 이웃을 늘 삼위일체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씬크레티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해서 씬크레티즘이 한 분 하느님의 정체를 위협한다는 배타적인 유일신론의 관점은 비판을 받게 된다. 아울러 유일신론이 배타적이라는 표현도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사실 유일신론(Monthoeismus)과 다신론(Polytheismus)은 신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신을 신앙하는 인간의 입장 표명이다. 신 자신은 이런 개념을 모른다. 이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유일신론 자체는 배타적이지 않다. 우리에게 배타적으로 알려진 구약의 유일신은 사실은 포용적이다. 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모두가 한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신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것(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도 그 이면에는 모두가 한 하느님 아래 한 인류임을 강조한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유일신론은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일치와 다양성의 관계를 종교의 본질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자기만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경고하면서 이방인들도 구원을 보리라고 선언하게 한다.
“뒷날, 야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우뚝 솟아 언덕들을 굽어보게 되는 날, 높이 치솟아 멧부리들을 눈 아래 두는 날이 오면, 만민이 물밀듯 밀려오리라. 모든 민족이 몰려 와 말하리라. ‘어서, 야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이 뽑으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거기서 어떤 길을 가리켜 주시든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르자!’ 그렇다. 야훼의 가르침은 시온에서 나온다.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들려온다.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시리라. 그리 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 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 만군의 야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어느 민족이나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지 않느냐? 우리도 자손만대에 우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며 살아가자.”(미가 4,1-5).
캄프하우스의 다음 말은 그 동안 성서의 유일신론이 다양성을 배제하고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해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견해를 수정해준다. 그는 말한다. 성서의 유일신론은 “처음부터 일치성과 다양성을 묶고자 하였다. 이것은 창세기에 드러난다. 인간의 족보나 부족(민족)의 계보는 모든 민족이 한 조상에게서 나왔음을, 모두가 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한다. 성서의 저자들은 죄를 지음으로 역사로부터 단죄 받은 민족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성서 저자들이 바로 민족의 계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특정 민족의 우월성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민족이 원천적으로 동일하고 서로 속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이다.”38) 이리하여 캄프하우스는 결론을 내린다. “유일신론이 근본적으로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한 하느님 - 한 인류’이다. ‘한 하느님 - 한 나라 - 한 황제’가 아니다. ‘한 하느님 - 한 민족- 한 영도자’는 더욱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민족과 관계한다. 다른 주제란 있을 수 없다. 제신들은 복수로 만들 수 있고 지역에 국한시킬(regionalisierbar) 수 있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느님은 너의 하느님일 때만 비로소 나의 하느님이 되고, 모든 이들의 하느님일 때만 비로소 우리의 하느님이 된다.”39) “모든 민족과 인간들이 형제자매이며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이 창세기 첫 장에서 선언되고 있다. 이것은 혁명적이다.40) 선민사상이나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자세는 볼 수 없다. 유다 전통은 오히려 “반선민사상”(antielitaer)41)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주적인 유일신론은 근원적으로 관용을 모르는 전체주의적인 폭력과 관련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임의적인 견해는 유일신론에 대한 오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42)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유일신론에 바탕을 둔 유대교와 그리스도가 타종교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고 인정하기보다는 배타적이고 비관용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스스로 그들이 고백하는 하느님을 잘못 믿었기 때문이다. 시몬 베이유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짓 하느님은 고통이 폭력이 되게 하고 참 하느님은 폭력이 고통이 되게 한다.”43) 폭력은 유일신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신관에서 나온다. 그리스도교가 지난날 하느님의 이름으로 비그리스도인에게 폭력을 가했다면 이는 하느님을 잘못 믿었다는 증거이다. 옳게 유일신을 믿었다면 옳게 믿는 남의 신앙에 대해 관용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거짓 하느님이란 있을 수 없다. 참 하느님을 옳게 신앙하거나 그릇되게 신앙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성서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참된 하느님 - 참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믿는 하느님, 이스라엘만(다른 민족이 아닌)의 하느님이 참된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분 하느님은 모든 이가 믿어야 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내 식으로 또는 이스라엘 식으로 믿기를 강조할 수는 없다. 때문에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잘못 신앙하고 있다고 탓하며 때로는 이방인의 신앙을 칭찬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민족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성서는 이렇게 구원을 이방인에게도 열어 놓는다.
그리스도교가 지난날 한 분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다른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이지 못한 것은 역사적인 부담으로 남아 있다. 동양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통해 데우스에 대한 신앙이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리하여 유일신 하느님을 반드시 내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식이 아닌 방식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신론의 토착화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식으로가 아니’라는 것이 물론 ‘어째도 좋다’는 것이 아님은 거기에 이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7. 맺는 말
모든 종교가 씬크레티즘의 과정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서구와 동양의 종교 문화를 단순 비교하면서 서구의 종교는 배타적이고 동양의 종교는 관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게 된다. 이런 도식은 인간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종교 자체는 그런 도식을 벗어나 있으며, 그런 도식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종교는 인간의 삶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종교들끼리는 늘 자연스럽게 씬크레티즘의 교환이 일어나고 있다.
씬크레티즘은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로부터 자기 종교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다른 종교는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종교를 이해하고 나아가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이다. 종교 자체가 씬크레티즘적이기 때문이다. 그 원형을 그리스도론에서 본다. 다양한 그리스도론은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더욱 이해하게 해 준다. 그리스도가 이미 다양성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리스도론의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다루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종교에 대한 물음에 부딪치게 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자기 자신의 관점도 이해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스도론에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론이 있다. 다양한 그리스도론의 뿌리는 다양한 전승에 근거한다. 바오로의 전승이 있고 공관복음의 전승이 있다. 하지만 이들 다양한 전승은 호환가능하며 결합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공생하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끌어들일 수 있다. 두 전승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신앙에 속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다양성을 구현하고 있다. 다양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올바른 가르침을 반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로써 씬크레티즘에 대한 질문도 새롭게 던져진다. 씬크레티즘은 종교사회학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며 교의적 사실이다. 씬크레티즘은 이질적인 신앙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승과도 관련되어 있다. 다른 신앙과 자신의 전승은 다양하게 작성되며, 다른 규정에 따라 그 차이들을 소화해낸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를 위해 본질적이다. 그 차이를 꺼릴 필요가 없고 그 누구에게도 이를 추정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전승 안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이해하는 가능성도 없어질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는 근본주의에 빠지게 되며 ‘여럿’에 대한 어떤 경험도 하지 못하게 된다. ‘여럿’은 모든 미래 신학의 토대이어야 한다. 미래의 신학은 - 만일 다양성 가운데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다면 - 필연적으로 씬크레티즘 신학의 근본이다.”44)
신학은 씬크레티즘에 나타난 다원성을 맹목적으로 결합시킬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설명해야 한다. 신학은 다양한 근거 위에서 하나의 씬크레티즘 신학을 요구한다. 씬크레티즘 신학 없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를 토착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남게 된다.45)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새롭게 씬크레티즘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모든 종교는 자기 주변에서 다른 종교들을 만난다. 여러 종교들은 한 가정 안에서, 한 도시에서, 한 나라에서 한 대륙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어린이들은 오늘날 공생의 씬크레티즘 속에서 자라면서 이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안고 있다.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