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저는 수백가지 질문거리들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수천, 수만가지요.
그래서 종종 어디서 시작해야 좋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냥 질문들을 나열해보도록 하라. 어디에서건 그냥 시작하라. 지금 당장 시작해보자.
우선 네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 목록을 만들어보라.
좋아요. 그 중 몇가지는 아주 유치하고 아주 진부해 보일 겁니다.
자신에 대해 판단하는 짓은 그만둬라. 그냥 나열하라.
알겠습니다. 지금 제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은 이렇습니다.
1. 제 인생이 마침내 도약하는 건 언제쯤일까요? '그것을 모아들여서' 약간의
성공이나마 거두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그 투쟁이 과연 끝날 수 있기는 한 겁니까?
2. 저는 언제쯤에나 남들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만큼 인간관계에 능숙 해지게 될까요? 관계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나요? 아니면, 그건 늘 힘겨운 과제일 수밖에 없나요?
3. 왜 저는 한번도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는 겁니까? 저는 늘 이렇게 쪼들리며 살아야 할 팔자입니까? 돈과 관련된 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걸 방해하는 게 뭡니까?
4. 왜 저는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 없는 겁니까?
5. 제가 직면하고 있는 일부 건강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저는 평생토록 지속되기에 충분한 고질병들을 앓아왔습니다.
왜 저는 지금까지도 그 모든 병들을 지니고 있는 겁니까?
6. 제가 이 생에서 배우기로 되어 있는 업장(業障)은 무엇인가요?
제가 터득하도록 애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7. 환생이란 게 있습니까? 저는 얼마나 많은 과거생을 거쳤나요?
그 생들에서 저는 무엇이었나요?
업보'라는 게 진짜로 있는 겁니까?
8. 저는 가끔 신들린 것 같은 기분을 강하게 느낍니다. '신들린 것' 같은 현상이 정말로
존재합니까?
제가 그런가요?
자신이 신들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하는' 겁니까?
9. 좋은 일을 하고 돈을 받아도 될까요?
제가 이 세상에서 치유하는 일, 신의 일을 하기로 선택한다면 그 일을 하면서 재정적으로도 부유해질 수 있나요? 아니면 그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가요?
10. 섹스를 해도 괜찮나요? 이 체험의 배후에 깔린 진정한 의미는 뭔가요?
성 행위는 몇몇 종교에서 가르치듯이 순전히 생식을 위한 건가요?
참된 성스러움과 자각은 성에너지의 부정, 혹은 변형으로 얻어지는 건가요?
사랑 없이 성 행위를 해도 괜찮나요?
단지 육체적인 쾌감만으로도 성행위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11. 우리 모두가 가급적 섹스를 멀리해야 마땅하다면, 당신은 왜 섹스를 그렇게 근사하고 황홀하고 강렬한 체험이 되게 하셨나요? 무엇을 주시려구요?
그와 관련된 문제로, 온갖 즐거운 일들은 어째서 '부도덕하거나 불법이거나 탐욕스러운' 걸까요?
12. 다른 행성들에도 생명체가 있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를 찾아온 적이 있나요?
우리는 지금 관찰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인가요?
우리는 사는 동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외계 생명체의 증거를 보게 될까요?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각기 나름의 신을 갖고있나요?
아니면 당신이 그 모든 것들의 신인가요?
13. 이 지구 행성에 언제고 유토피아가 도래하기는 하는 겁니까?
신은 약속한 대로 언젠가 지구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겁니까?
재림(再臨)이란 게 있습니까?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세상의 종말, 혹은 계시록의 대재난이란 게 과연 오는 겁니까?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참된 종교만이 존재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어떤 종교인가요?
이상은 제가 품고 있는 질문들 가운데 몇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몇백가지의 질문거리들을 갖고 있으니까요. 적고 보니 질문들 가운데 일부는 나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너무 유치해서요. 하지만 제발 대답해 주십시오. 한번에 하나씩, 그것들에 대해서 '얘기'해주십시오.
좋다.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질문들에 변명할 필요는 없다.
이것들은 과거 몇백년 동안 수많은 남녀들이 청해온 바로 그 질문들이었으니까.
만일 그 질문들이 어리석은 것이었다면, 그렇게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묻고 또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 첫번째 질문(인생의 도약과 성공에 관한 질문 - 옮긴이)으로 가보자.
나는 이 우주에 너희가 선택한 꼭 그대로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법칙, 즉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법칙들을 설정해놓았다. 너희는 이 법칙들은 위반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 이 책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는 이 법칙들을 따르고 있다. 이 법칙들은 만물이 작용하는 방식이기에 너희가 이것들을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다. 너희는 이 법칙에서 물러설 수도 없고, 이 법칙 밖에서 움직일 수도 없다.너희는 삶의 모든 순간마다 이 법칙 안에서 움직여왔다.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껏 체험한 것들은 모두 너희가 창조해온 것이다.
너희는 신과 동업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계약을 맺은 사이다. 너희에게 주는 내 약속은 너희가 요구하는 건 언제나 주겠다는 것이다.너희의 약속은 구하는 것, 구함과 응답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이미 한번 네게 설명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다.
네가 그 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너희는 삼중(三重)의 존재다. 너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
너희는 이것들을 육체, 비육체, 초육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삼위일체란 게 바로 이것이며, 너희는 이것을 온갖 이름으로불러왔다.
이것이 바로 너희이고 나다. 나는 삼위일체로서 나타난다. 너희 신학자들 중 일부는
이것을 성부, 성자, 성신으로 불러왔다.너희 정신과 의사들 역시 이 3개조를 인정하고
그것을 의식, 잠재의식, 초의식이라 불러왔다.
너희 철학자들은 그것을 이드와 에고와 수퍼에고로 불러왔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에너지, 물질, 반(反)물질이라 부른다.
시인들은 생각, 감정,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뉴에이지(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지난 사백년간 서구를 풍미해온 물질주의 사고방식의 폐해를 반성하고 동양의 정신 지혜들을 통해 물질문명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운동을 말한다 - 옮긴이) 사상가들은 몸, 마음,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희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진다. 이것이 잠재 의식, 의식, 초의식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을까? 공간 역시 비슷하게 여기와 저기와 사이 공간, 셋으로 나누어진다. 어렵고 잘 잡히지 않는 게 이 '사이 공간'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일이다. 너희가 규정하거나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너희가 가리키는 공간은 '여기' 아니면 '저기'가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이 공간'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영원한 지금이 '전'과 '후'를 제대로 받쳐주듯이, 그것은 '여기'와 '저기'를 제대로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너희의 이 세 측면들은 사실은 세가지 에너지다. 그것들을 생각, 말,행동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세가지가 함께 합쳐져서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 그것을 너희의 언어 혹은 이해방식으로는 느낌 혹은 체험이라고 한다.
너희 영혼(잠재의식, 이드, 혼, 과거 등등)은 너희가 일찌기 가졌던(창조했던) 모든 느낌의 총합이다. 그 느낌들 중 자각하는 일부를 너희는 기억이라 한다. 기억(memory)할 때 너희는 재구성한다(re-member),즉 함께 다시 놓는다, 다시 모은다(reassemble)고 말한다. 너희가 자신의 모든 부분들을 다시 모을 때, 너희는 '자신'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창조 과정은 생각, 즉 발상, 개념, 시각화에서 시작된다. 너희가 지금보는 모든 것이
한때는 누군가의 발상이었다. 너희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처음에 순수한 생각으로만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점은 우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생각은 창조의 첫 단계다.
그 다음에 말이 온다. 너희의 모든 말은 밖으로 표현된 생각이다. 말에는 창조력이 있고, 말은 창조 에너지를 우주 속으로 내보낸다. 말은 생각보다 더 역동적이다(따라서 좀 더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은 생각과 진동 수준이 다르다. 말은 생각보다 더 강한 충격으로 우주를 뒤흔든다(바꾸고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친다).
말은 창조의 두번째 단계다.
그 다음에 행동이 온다.
행동은 움직이는 말이다. 말은 표현된 생각이다.
생각은 형성된 발상이고, 발상은 한데 모인 에너지들이다. 에너지는 풀려난 힘이고,
힘은 존재하는 요소들이다. 요소들은 신(神)의 조각들이고, 전체의 일부들이며,
모든 것의 재료이다.
그 시작은 신이다. 그 끝은 행동이다.
행동은 창조하는 신, 즉 체험된 신이다.
너희는 자신이 신의 일부가 되고 신과 동업관계를 맺기에 충분할 만큼, 훌륭하지도 않고 경이롭지도 않고 죄 없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부정해온 탓에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말았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어쩌다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그 모두가 신성한 계획의 일환이다. 너희가 이미 너희 자신이라면 너희는 '자신'을 불러낼 수도 창조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자신'을 충분히 창조함으로써, 즉 불러냄으로써 '자신'을 충분히 체험하자면, 우선 나와의 연결을 끊는(부정하거나 잊는) 게 필요했다. 너희의 가장 원대한 소망이자 내 가장 위대한 바램은, 너희 자신을 너희이기도 한 나(Me you are)의 일부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단일한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자신을 체험하는 과정 속에 있다. 내가 너희를 통해 그러하듯이.이 동업관계를 이해하겠는가? 그 의미를 파악하겠는가? 그것은 신성한 협력, 참으로 성스러운 교섭이다.
네가 인생이 '도약하는' 걸 선택할 때, 네 인생은 너를 위해 그렇게 할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길 선택하지 않았다. 너는 꾸물거리고 미루고 연기하고 항의해왔다. 이제 내가 네게 약속한 걸 공표하고 만들어낼 때가 왔다. 이렇게 하려면 너는 약속을 믿어야 하고, 또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한다. 너는 신의 약속을 실천해야 한다. 신의 약속은 네가 그의 아들이요, 그녀의 자식이며, 신과 닮은꼴이고,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하...... 네가 걸려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군. 너는 '그의 아들'이니, '자식'이니, '닮은꼴'까지는 받아들이지만 '신과 동등한 존재'에서는 움츠려드는구나. 너무 버거운 얘기라, 너무 엄청나고 너무 놀랍고, 너무 부담스러운 얘기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로군. 왜냐하면 네가 신과 동등하다면, 그건 그 무엇도 너를 어쩌지 못한다는 뜻이고, 모든 것이 네 손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니까. 이 세상에는 희생자도 없고, 악당도 없다. 오로지 네 생각의 결말들만이 있을 뿐이다. 네게 말해주마. 너희가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은 너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한 것의 결말이다. 너는 자신의 인생이 정말로 '도약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에 관한, 자신에 관한 생각을 바꾸어라. '너이기도 한 신(God you are)'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물론 이것은 너를 주위사람들 다수, 아니 대다수에게서 떼어놓을 것이다. 그들은 너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네가 신을 모독한다고 말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네게 질색하면서 너를 십자가에 매달려 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네가 너 자신의 환상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대다수 사람들은 네가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지는 걸 허용해줄 만큼은 관대하다), 조만간 다른 사람들이 네 진리에 끌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약속들은 그들에게도 유효한 것이기에.네가 주위 사람들을 위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기에, 그들은 이 지점에서 네게 간섭하려 들 것이다. 네 단순한 진리, 단순한 삶은 이 지상의 네 동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과 더 많은 안락과 더 많은 평온과 더 많은 기쁨을 주고,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이기에.
그리고 네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건 그 사람들 방식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미움과 두려움과 완고함과 전쟁의 종말을 뜻하고, 내 이름으로 행해져온 비난과 살인의 종말을 뜻하며, 힘이 정의가 되는 현실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힘으로 손에 넣는 행동의 종말을 뜻하고, 두려움에서 비롯된 충성과 경배의 종말을 뜻하며, 너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세상, 한참 멀리까지 창조해낸 대로의 세상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그러니 어진 영혼이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라. 네가 자기실현이라는 성스러운 대의(大義)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너를 비방하고 경멸하고 야유하고 버릴 것이며, 마침내는 자기네가 아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너를 고발하고 심문하고 재판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겠는가?
네가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세상이 네게 가져다준 것들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 너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해준 것들을 놓고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고통과 괴로움을 멎게 하고 환상을 끝장내고자 한다. 너는 지금대로의 세상에 질려 있다. 너는 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한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구하지 마라. 이제 그것을 불러내도록하라.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우선 자신에 관한, 네 가장 고귀한 생각(자신이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생각 - 옮긴이)을 갖도록 하라. 네가 날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산다면 되리라고 생각되는 네 모습을 상상해보라.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에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라. 그 모습과 네가 현재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느냐?
예.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좋다. 지금 이 순간의 너는 자신에 관한 고귀한 전망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너도 나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제 네가 지금 있는 곳과 되고자 하는 곳 사이의 차이를 알았으니,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을 네 가장 고귀한 전망에 걸맞게 바꾸기 시작하라. 의식적으로 바꾸기 시작하라.
그렇게 하려면 실로 엄청난 정신과 육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순간순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일도 해야 한다. 또 여기에는 선택을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이 자각으로 가는 위대한 발걸음이다. 만일 네가 이 도전을 받아 들인다면, 너는 평생의 반을 아무 의식없이 보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너는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들을 체험할 때까지는, 네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의식 차원에서 자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며, 또 이 결과들을 체험하고 나면, 그 결과들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관련 있음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얘기는 그런 의식 없는 삶을 그만 두라는 외침이다. 이것은 너희의 영혼이 태초부터 너희에게 일깨우고자 했던 과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계속 관찰해나간다는 건 끔찍할 정도로 피곤한 일이 될것 같은데......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제 2의 천성(天性)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그것은 너희의 두번째 천성이다. 너희의 첫번째 천성은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의 첫번째 천성, 즉 너희의 참된 천성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두번 째 천성이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걸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의식하는 게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 전과 달라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우둔해지지는 않는다. 예수가 멍청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처가 함께 있기에 따분한 존재였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함께 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깨달음을 얻는 그 누구도 멍청하지 않다. 아마 남다르고 비범하긴 하겠지. 하지만 결코 멍청하지는 않다.
그래 네 삶이 '도약하길' 바란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네가 되기를 바라는 대로 네 삶을 그려보고 그 속으로 옮겨가도록 하라. 그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을 점검하라. 그런 것들에서 떨어져라. 네 고귀한 전망에 걸맞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하라. 네 가장 위대한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끔 적어두어라.
네
가장 좋은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연관된 사람들과 함께 그런 행동을 바로잡도록 하라.
전에도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저는 그럴 때마다 너무 솔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 싫었습니다. 예컨대 속이 몹시 매스껍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마라, 쫄딱 망해서 빈털털이가 되었더라도 그 사실을 입밖에 내지 마라, 기분이 아무리 산란해도 그런 티를 내지 마라는 식의 얘기들 말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지옥으로 보내진 세 사람에 관한 농담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은 가톨릭교도였고, 한 사람은 유태인, 또 한 사람은 뉴에이지 사상가였지요. 악마가 가톨릭교도에게 조롱하듯 물었습니다. "자, 어떤가? 뜨뜻한 게 즐길 만 한가?" 그랬더니 가톨릭교도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온도를더 높여달라고 신께 부탁하는 중이요."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다음에 악마는 유태인에게 물었지요. "자넨 어떤가? 뜨뜻한 게 즐길 만 한가?" 그러자 유태인은 "내가 이보다 더 한 지옥만 빼고 달리 뭘 더 바라겠소?"라고 대답 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가 뉴에이지 사상가에게 가서 "뜨겁지?" 하고 물었더니 뉴에이지 운동원은 찐땀을 흘리면서 "뜨거워? 뭐가 뜨거워?"하고 반문했답니다.
재미있는 농담이다. 하지만 나는 문제를 무시하거나 문제가 없는 척하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그상황에 관련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을 말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만일 네가 망했다면 너는 망한 것이다. 그 사실을 놓고 거짓말을 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얘기를 지어낸다는 건 속을 허하게 만드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망했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잣대는 그 사실에 관한 네 생각, 예를 들면, "망한 건 나쁜 일이다", "이건 끔찍한 일이다", "괜찮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실제로 망하기까지 하는 일은 절대 없는데, 나는 못난 놈이다" 따위의 생각이다.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망한 상태로 있을 것인지 보여주는 건 그 사실에 관한 네 말, 예를 들면, "나는 망했어", "나는 땡전 한푼 없어", "내 수중에는 돈이 말랐어" 따위의 말이다. 네 현실이 그런 식으로 지속되게 만드는 것은 그 사실을 둘러싼 네 행동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잔뜩 기가 죽어 앉아 있고,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이유로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 들지 않는 따위의 행동이다.
우주에 관해 이해해야 할 첫번째 사실은 어떤 상황도 "좋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그냥 있을 뿐이다. 그러니 가치판단 내리길 그만둬라. 두번째로 알아둬야 할 사실은 모든 상황이 다 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항상 똑같이 머무는 건 없으며, 정지된 채 남아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뭔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느냐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또 말씀을 끊어야겠군요. 병이 들었는데 산도 움직일 만한 믿을 갖고 있어서 자기 몸이 곧 나을 걸로 생각하고 말하고 믿고 있었는데... 불과 육주 뒤에 죽은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건 그 모든 낙관적인 생각이나 긍정적인 행동양식들 하고 어떻게 부합되는 겁니까?
아주 좋다. 너는 계속 까다로운 문제들을 묻고 있다. 이건 좋은 일이다. 그러고 보면 너는 단순히 내 얘기가 네가 든 예들(가톨릭교도와 유대교도와 뉴에이지 사상가의 사고방식을 꼬집은 앞의 농담 - 옮긴이) 중 하나에 해당된다고 오해하는 것이 아니다. 선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언제고 너는 내 얘기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결국에 가서는 "내 말을 믿어보거나 부정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즉 너와 내가 이 일을 놓고 영원히 논란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지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니 대화를 계속해 보도록 하자.
'산도 움직일 만한 믿음'을 가졌으나 육주 뒤에 죽은 사람은 육주동안에 산을 움직였다. 아마 그에게는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좋아, 이만큼 했으면 충분해. 이제 나는 또 다른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됐어"라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그런 결심을 말해주지 않았을테니 너희가 그 결심을 모를 수도 있다. 사실 그 사람은 좀 더 빨리, 죽기 며칠 전이나 몇주 전에 그런 결정을 내렸으나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수 있다.
너희는 죽고자 하는 것이 전혀 괜찮지 않은 사회,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것이 전혀 괜찮지 않은 사회를 창조해냈다. 너희가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그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누군가가 죽고 싶어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이 삶보다 더 나은 상황은 무수히 많다. 나는 너희가 조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너희가 죽기를 택하는 다른 누군가를 눈 앞에서 보고 있을 때는 이런 진리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진리들이 그렇게 자명한 것들은 아니기에. 죽어가는 사람도 너희가 그렇다는 걸 안다. 그 여자는 그 방안에서 자신의 결정을 어떤 수준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 눈치챈다.
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방이 비기를 기다리는지 눈치 챈 적이 있는가?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괜찮으니 어서 가. 가서 뭐 좀 먹어."라거나 "가서 눈 좀 붙여. 난 괜찮아. 내일 아침에 와."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고 나서 그 충성스런 감시자들이 떠나고 나면 비로소 영혼도 감시당하던 몸을 떠난다.
만일 그들이 방에 모여든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난 이대로 죽고싶어"라고 말한다면, 거기 모인 사람들은 정말로, "오, 그건 진심이 아닐꺼야"라거나, "그런 말 하지마"라거나, "이대로 있어줘"라거나, "제발 날 두고 가지 마"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의료인들은 환자가 위엄을 잃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무조건 목숨을 부지하게 만들도록 훈련 받는다. 너도 알다시피 의사나 간호사에게 죽음은 실패를 뜻한다. 친구나 친척에게 죽음은 재앙이다. 오로지 영혼에게만 죽음은 구원이고 해방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그들이 평온하게 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 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이 "견뎌야 한다"거나, 계속 힘들어해야 한다거나, 자신들을 염려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자신이 살 거라 말했고, 살 거라 믿었으며, 심지어 살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한 그 사람은 아마도 십중팔구 영혼의 차원에서 '마음을 바꾸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른 목표들을 추구 하기 위해 영혼이 몸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는 결정을. 영혼이 이런 결정을 내릴 때 몸의 어떤 행동도 그 결정을 바꿀 수 없다. 마음의 어떤 생각도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몸-마음-영혼의 3개조 중에서 어느 것이 만사를 경영하는지 깨닫게 된다.
너희는 평생토록 자기 몸이 자기라 여긴다. 너희는 간혹 가다 자기 마음이 자기라 여기기도 한다. 너희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찾아낸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영혼에게 고분고분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이런 상황도 네가 묘사한 시나리오(믿음을 가졌으나 6주 후에 죽은 사람 이야기 - 옮긴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 자기 영혼의 말을 듣는 것이다(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렇게 한다는 데 유의하라).
이제 영혼이 앞장서서 몸을 떠날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영혼의 영원한 하인들인 몸과 마음은 이 말을듣게 되며, 그와 더불어 유리(遊離) 과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마음(에고)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이것은마음이라는 존재의 종말을 뜻한다. 그래서 마음은 몸에게 죽음에 저항하라고 지시한다. 몸 역시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지시를
기꺼이 이행한다. 몸과 마음(에고)의 창조물인 외부세계는 몸과 마음의 이런 결정을 크게 격려하고 크게 칭찬한다. 그렇게 해서 그책략은 확정된다.
이제 이 지점에서는 영혼이 얼마나 간절히 떠나고 싶어하는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만일 여기서 떠나는 게 그렇게 급하지 않다면 영혼은, "좋다, 너희가 이겼다, 너희와 함께 좀 더 머무르겠다" 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로 머무는 것이 더 높은 일정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이 분명할 때면, 즉 자신이 그 몸을 통해서는 더 이상 진화할 방법이 없다는 게 분명할 때면, 영혼은 떠날 것이고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 해서도 안 될 것이고.
영혼은 자신의 목표가 진화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진화야말로 영혼의 유일한(sole) 목표이자 그것의 영적(soul) 목표다. 그것은 몸의 성취나 마음의 성숙에는 관심이 없다. 영혼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혀 무의미하다. 또 영혼은 몸을 떠나는 일이 별다른 비극이 아니란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극은 몸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영혼이 이 죽음 전체를 다르게 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한다. 물론 영혼은 '삶' 전체도 다르게 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살면서 심한 좌절과 불안을 느낀다. 너희의 좌절과 불안은 영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어떻게 해야 제 영혼의 말을 가장 잘 들을 수 있을까요? 설사 정말 영혼이 보스 같은 존재라 해도 제가 수뇌부(영혼을 뜻한다 - 옮긴이)에서 내려온 지시문들을 받고 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너는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파악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영혼에 대해 판단하는 짓을 그만두고.
제가 제 자신의 영혼에 대해 판단하고 있다구요?
끊임없이. 나는 방금 전에 죽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해 너희가 어떤 식으로 판단하는 지 보여주었다. 너희는 자신이 살고 싶어한다고, 참으로 살고 싶어한다고 판단한다. 또 너희는 자신이 웃고 싶어 한다고 판단하고, 울고 싶어한다고 판단하며, 이기고 싶어한고 지고 싶어한다고 판단한다. 즉 기쁨과 사랑을 체험하고 싶어한다고 판단한다. 특히 너는 자신이 지고 싶어한다는 판단을 잘 내린다.
제가요?
너는 어디선가 자신의 기쁨을 부정하는 게 신성한 태도요, 삶을 찬양하지 않는 게 성스러운 태도라는 사고방식을 만난 적이 있다. 너는 자신에게 말해왔다. 부정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부정하는 게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그냥 부정일 뿐이다. 만일 너 자신을 부정하고 나서 기분좋게 느낀다면 네 세계에서 그것은 좋은 것이다. 만일 네가 기분 나쁘게 느낀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대개의 경우엔 너는 판단하지 못한다. 너는 그래야 한다고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자신을 이런저런 식으로 부정한다. 그러고 나서 너는 그렇게 한 건 좋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자신이 기분 좋게 느끼지 못 하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므로 맨 먼저 할 일은 자신에 대한 이런 판단들을 그만두는 것이다. 영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바램과 함께 가라. 영혼과 더불어 가라. 영혼이 추구하는 것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의 느낌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바램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목표다. 영혼은 그 느낌을 추구한다. 지식이 아니라 느낌을. 지식은 이미 갖고 있지만, 지식은 개념에 불과하다. 느낌은 체험이다. 영혼은 자신을 느끼고자 하며, 직접 체험하여 자신을 알고자 한다.
가장 고귀한 느낌이란 '존재 전체'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은 영혼이 갈망하는, 진리로의 위대한 복귀(復歸)이다. 이것이 완벽한 사랑의 느낌이다. 완벽한 사랑이란 완벽한 흰빛이 일반 빛깔에 대해 어떤 관계인지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흰빛을 아무 빛깔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흰빛은 모든 다른 빛깔을 다 포함한다. 흰빛은 존재하는 모든 다른 빛깔이 섞인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증오, 분노, 정욕, 질투, 탐욕)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감정의 합(合)이다. 그것은 그 모든 감정의 총화이며, 모든 것(everything)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맛봐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무슨 수로 연민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내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감정을 다른 사람이 품고 있을 때 무슨수로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밟아나가는 여행의 단순함과 그 외경스런 위대함을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그것이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지 이해한다. 인간 영혼의 목표는 그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인간의 영혼이 한번도 아래에 있어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번도 오른쪽에 있어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왼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차가움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으며, 악을 거부하고서 어떻게 선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영혼은 뭔가가 될 수도 없다.
영혼이 자신의 숭고함을 체험하려면,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숭고함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숭고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은 공간 에서만 숭고함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음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것을 축복한다. 자신의 다른 부분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자신의 일부를 그 속에서 보기 때문에. 물론 영혼이 하는 일은 우리가 숭고함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 최상의 '자신'을 고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너희가 고르지 않는다 해도 비난하는 일 없이.
이것은 많은 생을 들여야 할 만큼 엄청난 과제이다. 왜냐 하면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축복하기보다는, 판단내리기 에 급급하고, 뭔가를 '잘못됐다'거나 '나쁘다'거나 '충분치 않다'고 규정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비난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을 하고 있다. 사실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해를 입히려 한다. 너희는 그것을 파괴하려 한다.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이 있다면, 너희는 그것을 공격한다. 자신의 종교에 맞서는 종교가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생각
과 상반되는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비웃는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이념이 존재하면, 너희는 그것을 배척한다. 너희는 잘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건 반쪼가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다른 반을 거부하며 내칠 때 너희는 자신의 반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건 정말 하나같이 심오하군요. 감사합니다. 그 누구도 제게 이런 얘기를 해준 일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는요.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진심입니다. 하지만 이 중 일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당신은 우리가 '옮은 것'을 이해하려면 '그른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그건 예를 들면 우리가 악마도 끌어안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악마를 치유할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 물론 진짜 악마 같은 건 없지만, 네가 선택한 용어로 대답한다면 말이다. 치유란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 중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걸 이해하겠느냐? 신 말고는 선택할 것이 전혀 없다면, 너희는 신이 되길 선택할 수도 없다.
아니, 잠깐만요! 신이 되길 선택한다는 얘기를 한 게 전혀 아닌데요.
가장 고귀한 느낌은 완벽한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는 신에 관한 묘사로 그보다 더 나은 걸 찾을 수 있겠느냐?
아뇨, 없습니다.
자, 네 영혼은 가장 고귀한 느낌을 찾고 있다. 그것은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고자, 완벽한 사랑이고자 한다. 네 영혼은 이미 완벽한 사랑이다. 네 영혼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네 영혼은 그것을 아는 것 이상을 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완벽한 사랑이 되고자 한다. 당연히 너희는 신이 되려 하고 있다! 그것 외에 네가 이르고자 하는 다른 어떤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그런 식의 생각엔 그냥 뭔가 불경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악마처럼 되려는 데서는 불경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면서 신처럼 되려는 것에는 질겁을 하다니, 그거 재미있군--
잠깐만요! 누가 악마처럼 되려 한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너희 모두가! 너희는 심지어 자신의 악함을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너희가 죄 속에서 태어났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종교까지 창조해냈다. 그런데도 내가 너희는 신에게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순수한 신이고 여신이며, 순수한 사랑이라 말한다면, 너희는 내 말을 거부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이 나쁘다는 걸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일에 한 평생을 허비해왔다. 자신이 나쁠 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들도 나쁘다. 성행위도 나쁘고, 돈도 나쁘고, 기쁨도 나쁘고, 권력도 나쁘고, 많이 가지는 것도 나쁘다. 뭐든지 많이 가지는 건 나쁘다.
너희의 몇몇 종교들은 심지어 너희에게 춤추는 것도 나쁘고, 음악도 나쁘며, 삶을 찬양하는 것도 나쁘다고 믿게 만들었다. 얼마안가 너희는 미소짓는 것도 나쁘고, 큰소리로 웃는 것도 나쁘며, 사랑하는 것도 나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아니, 천만의 말씀, 내 친구여. 네가 다른 것들은 아마 확신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점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너 자신과 네가 바라는 것 대부분이 나쁘다는 것만은. 너는 자신을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더 착해지는 걸로 결정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어떻게 가든 목적지는 똑 같으니까. 더 빠른 길, 더 짧은 길, 더 쉬운 길이 있다는 게 다를 뿐.
어떤 길이 그런 길인가요?
지금 당장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 예수가 한 일이 이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길이고, 크리슈나의 방법이며, 이 행성에 나타난 모든 선각자들의 발자취이다. 그리고 모든 선각자들은 하나 같이 이런 가르침을 전했다. 나는 곧 너희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희도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이 이상 가는 것도 하게 되리라. 하지만 너희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대신 너희는 훨씬 더 어려운 길, 자신을 악마라 생각하고 자신을 악하다고 상상하는 길을 선택해왔다.
너희는 예수의 길을 밟는 것,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크리슈나의 빛을 간직하는 것, 위대한 선각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자신'을 받아들이기보다 부정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너희는 선이요, 자비요, 연민이요, 이해다. 너희는 평화요, 기쁨이요, 빛이다. 너희는 용서요. 인내요, 강함이요, 용기이다. 필요할 때는 도와주는 이요, 슬퍼할 때는 달래주는 이요, 다쳤을 때는 치료해주는 이요, 혼란스러워 할 때는 가르쳐주는 이다. 너희는 가장 심오한 지혜이고, 가장 고귀한 진리이며, 가장 위대한 평화이고, 가장 숭고한 사랑이다. 바로 이런 것이 너희이다. 그리고 살면서 순간순간 너희는 자신을 이런 것들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제는 자신을 항상 이런 것들로 인식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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