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나
돌이켜 보면
내게 시인의 재능이란
애시당초 없었다
그렇다고 산문가로서 재주가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시를 쓰고는 싶었다
아주 오래 전
사춘기 문학 소년 시절부터
시인처럼 느끼고 사는 게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며
참으로 사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진실을 위해 사는 사람
사랑으로 사는 사람
자유롭게 사는 사람
창조하며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시인의 천분과 자질이
너무나도 모자랐다
참되게 살지도
온전히 사랑하며 살지도
자유롭게
창조하며 살지도 못 하였다
그래도 지금 나는
초라한 저녁 밥상을 물리고
설거지하기 전
칫솔질을 하려다 말고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따라서
화장실 좌변기 위에 앉아
이렇게 시도 산문도 못 되는 글줄을
광고전단지 뒷면에
끼적거리고 있다
시인이라 자임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란 자격인데도
비록 못난 얼굴이지만
조금만이라도
시인의 얼굴을 닮고자
좀더 사람답고자
너무나도 쉽게
시 아닌 시를
쓰고 앉아 있다
2008. 11. 20. 목요일
첫눈 오신 날 흐린 저녁에 쓰다.
2018. 8. 23. 낮에 고치다.
'시가 꽃피는 뜰(자작시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쉰 살 즈음에 (0) | 2008.12.15 |
---|---|
시와 나 (0) | 2008.11.22 |
무릇 이렇게 살지니라 (0) | 2006.07.31 |
폐허의 유적지에서 (0) | 2006.07.31 |
껍질의 꿈 (0) | 2006.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