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생각 / 강신표 제례(祭禮)의 문화적 전통 우리 사회의 변화는 생활의 어느 한 부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전반적인 사회구조의 총체적 변화이기 때문에 도시, 농촌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계층이나 직업을 불문하고,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동안 경제개발을 목표로 한, 산업구조의 전반적 재편성은, 과거의 농경사회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살아온 생활환경을 그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변화도 전통적 생활방식에 안주해서 살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산업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경쟁에 뒤지지 않으려면 밤낮으로 뛰며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의 변화에 맞춰 그렇게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변화의 물결이 강하면, 그 만큼 변화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물결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때로는 변화자체가 두려울 때도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문명은 변화를 예측하고, 변화를 통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앞으로 닥칠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맞춰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자연변화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어떤 절대적인 한계인지도 모른다. 오래전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는 그 속에 초자연적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 그리고 무수한 별들, 바람, 비, 산과 강등에 내재하는 어떤 초자연적 존재를 믿었다. 과거의 농경사회는 자연에 의존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에 내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너머에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초자연적 존재에 대하여 생명을 유지시키는 음식을 바치며 기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인간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천지신명에게 인간의 보살핌을 기원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인간이 사는 것은 사회이다. 사회는 인간이 태어나는 가족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상 없는 자손은 없다. 오늘에 우리가 있는 것은 조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상은 살아생전뿐 아니라,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자손을 돌보고 있다고 믿었다. 한국에서 가족이 강한 결속력을 가지는 것은, 돌아가신 조상이 언제나 후손을 돌보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상이 후손을 돌보고 있다면 자손은 조상의 공덕을 잊어서도 안 되고, 조상이 후손을 돌보듯이, 자손은 조상에 대해서 계속해서 그 공덕을 기려야 한다. 돌아가신 조상을 살아 계실 때와 같이 효(孝)로써 받드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이 살아서 앞에 계시는 듯해야 하고, 돌아가신 분 섬기기를 살아 계신 분을 모시듯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일반가정에서 봉행 되어 오던 제례(祭禮)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당제이다. 집안에 사당을 모시고, 고조이하 4대의 신위를 봉안하는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돌아가신 기일에는 제사를 올렸다. 집안에 큰일이 생겼을 때 반드시 먼저 아뢰고,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조상의 사당에 올렸다. 계절이 바뀔 적에도 사당에서 제사를 올렸다. 특히 동지(冬至)에는 시조제(始祖祭)를 올렸는데, 동지는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보았던 것이다. 입춘(入春)에는 선조제(先祖祭)라고 해서 시조이하 고조이상을 제사지내는데 만물이 싹트기 시작하는 입춘을 맞아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기제(忌祭)를 올리지 않는 4대조 이상에게는 3월 상순에 묘제를 올렸다. 사대봉사(四代奉祀)라 해서 위로 4대까지는 돌아가신 날에 기제를 올렸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행해지고 있는 제례는 차례(茶禮), 기제, 시제(時祭)등인데, 차례는 사당제와 함께 혼합되어 지역과 가문에 따라 다소 다르게 나타난다. 대체로 설날, 대보름날, 한식, 단오, 칠석, 추석, 중양, 동지등에 지내는데 이중에서도 설과 추석에 많이 지내고 있다. 시제는 묘제, 묘사, 시향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따져보면 우리의 조상들은 옛날에 한 해를 제사로 시작해서 일년 동안 끊임없는 제례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제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중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점에서 일상생활의 주기를 가늠하고, 생활의 구심점을 찾는데 조상을 생각하는 것이 그 정점을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제사상을 준비하는 데는 몸과 옷차림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다한다든지, 제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며 절을 하면서 오늘을 있게 한 조상님들을 새롭게 다시 뵙는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나, 그것을 진열하는 과정에서 선대의 어른들이 어떻게 했던가를 되돌아보고, 다음 세대들이 배우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제삿날에 흩어져 살던 친척들이 함께 모여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가 어떻게 무엇을 도와야 할 것인가를 의논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시제 때는 지방각지에서 모인 친족들이 종친회를 열어 종친회사업과 결산보고를 하는 경우도 많다. 현대 도시생활과 산업사회생활은 점차로 핵가족을 중심으로 분화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전통사회에서 치러지던 각종의 의례들을 점점 더 멀리하게 만든다. 시간의 여유가 없고, 그리고 끈끈하게 묶어 놓았던 동족간의 유대도 옛날 같지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새로운 물결이 간헐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민속 설이 새롭게 부활되고, 이에 따라 음력설날 제사지내는 풍습도 되살아나고 있다. 설날과 추석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고속도로가 막히는 것은 새삼스럽게 뿌리를 찾아 가족이 함께 모이는 모습의 한 단면인 셈이다. 한나라의 문화적 전통은 그 민족이 오랜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한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가족주의라는, 가족을 중심으로 결속되고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데 있었다면, 그 가족의 근원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흔히 하던 이야기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역사가 있다. 그 역사는 오늘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시 다음의 자손들에게 튼튼한 뿌리의 일원으로 자기 몫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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